***벤의 이름은 벨입니다. 히카루는 그대로구요.

***이 부부가 게이인 것도 좋지만 레즈인 것도 좋습니다...ㅠㅠ 






히카루 술루는 스타플릿 정문 앞 계단에서 애써 느긋한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방 티가 나는 것이, 긴장할 때면 들고 다니는 니코틴 함유 담배 한 개비를 손 안에서 문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고 싶었지만, 스타플릿 앞이라는 지리적 요소와 곧 벨이 올 시간이라는 약속의 환기는 그녀에게 그럴 용기를 없애버렸다. 대신에 히카루는 담배를 반복적으로 문질러대며, 혹시 손에 냄새가 묻어나는 것은 아닐지 의심을 하고 있었다.


빨간 생도복 대신 빨간 체크 남방과 검은 로고가 새겨진 하얀 브이넥 티를 입은 그녀는 어떻게 하면 자신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 오늘의 패션도 나름 그에 맞춘 것이었다. 구시대적 표현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부치 스타일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기본으로 자신한테 어울리는 옷을 찾으려 하니 패션의 테러라고 불리우는 체크 남방에 손을 뻗치게 되었지만 그녀는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약속의 순간이 다가오자 그녀는 서서히 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패션 디자인은 아니지만 유니버설 디자인 회사에서 디렉터로 근무하는 벨의 눈높이에 자신이 이상해보이진 않을까, 아니면 아무래도 촌스러워 보이는 이 스타일을 벨이 부담스러워하진 않을까, 따로 관리를 하지 않은 데다가 밤샘 공부로 푸석푸석한 머릿결과 화장기 없이 창백하기만한 피부-화장법을 잘 모르기도 했다-를 떨떠름하게 보진 않을까 등등이 확신의 소멸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걱정들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제발 제임스 커크라든가 제임스 커크라든가 제임스 커크라든가 그를 비롯한 사람들이 그녀의 이 초조한 기다림을 보지 않았으면 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민망함.


그녀는 며칠 전 자신의 연애 상담을 해준 오픈리 게이인 커크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거 봐! 그 사람 너 맘에 들어한다고 했잖아! 레너드~! 히카루가 드디어 여친이 생겼대! 아, 루시, 히카루 넘볼 생각하지마! 걘 이미 임자가......’


영웅의 아들은 개뿔, 히카루는 생각했다. ‘그’ 히카루가 여친이 있대! 라는 어조의 말들이 커크의 입을 통해 전교로 퍼져나간 것이다. 어머어머, 진짜? 루시 불쌍해..... 걔 책상에 사탕도 두고 막 그랬는데...... 원래 연애 가장 안 할 것 같은 사람들이 연애 가장 빨리해. 장담하는데, 1년 안으로 청첩장 날아든다. 내기할래?...... 그녀는 많은 이의 관심을 받아야 했고 또한 여친이 누구냐는 질문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녀는 며칠 전을 회상하면서 정문으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스타플릿 아카데미 식당가를 잘 몰랐던 벨은 정문에서 기다려달라고 부탁했고, 히카루는 울며 겨자먹기하는 심정으로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벨이 빨리 와줬으면 했다. 정문과 도로를 동시에 곁눈질하며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을 즈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히카루?”

“벨!!!”


진짜로 놀라 자빠질 뻔한 히카루는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내지르며 벨에게 고개를 돌렸다. 짧고 검은 머리가 시야에 스쳤다. 히카루가 캑캑거리며 숨을 고르자 벨이 물었다.


“무슨 일 있나요?”

“아뇨, 아뇨...놀라서.”


벨은 미안한 얼굴이었다.


“인기척을 냈어야 하는데.....”

“아니에요, 어....그래요, 이제 갈까요?”


히카루는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다급히 물었다. 벨은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무슨 일 있어요? 왜 이렇게 급......?”

“야, 히카루! 연애하냐? 잘 해봐!!!”


벨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잠깐 당황한 듯 싶었지만 곧 호호호 웃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커크임을 안 히카루는 속으로 펜싱 날을 갈았다. 제임스 커크, 죽여버릴 영웅의 아들, 수업 때 보기만 해봐.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히카루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침착한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흠, 이 근처에 굉장히 잘하는 스테이크 집이 있어요.”






그래, 이 사람이 내 여친이다. 이 사람이 내 애인이라구!! 히카루는 스타플릿 정문에서 멀어질수록 길거리에서 큰 목소리로 외치고 싶은 맘을 억눌러야 했다. 벨 린메이가 내 애인이다!!! 그러나 그녀는 우아하고 지적이며 시크하면서도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에게 강력한 제재를 가하고 있었다. 햇빛은 베개 속의 솜처럼 몽실거렸고, 벽돌 깔린 길은 이상하리만치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은 조근거리며 대화하고 있었다. 구름 위를 걷는다는 건 바로 이런 기분일까? 히카루는 자꾸만 귀에 걸리려는 입을 끌어내렸다.


“......스타플릿은 생각보다 재밌는 곳 같아요. 전 뭐랄까, 굉장히 똑똑한 사람만 모였으니까, 매일매일 공부만 하고 모두 수학 공식을 입에 달고 다니는 줄 알았어요.”

“전 처음에 어때 보였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솔직히 말하자면?”

“너드.”

“이런!”


히카루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타수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많이 하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스스로를 너드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어요. 그럼 벨은 너드 취향인가요? 크고 두꺼운 안경에 옷이 후줄근한?”

“하지만 당신은 안경을 쓰지 않았죠. 그리고 체크무니와 티셔츠가 잘 어울리는걸요.”

“정말 고마워요. 이거 하나 고르려고 일주일 내내 고민했어요.”

“......당신 참 예뻐요.”


벨은 얼굴을 수줍게 붉히면서 말을 끝맺었다. 히카루는 귀가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황급히 말을 마쳤다.


“당신은 더 이쁜 걸요!”


그 말에 벨은 약간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전 당신처럼 날씬하지도, 그다지 피부가 하얗지도......”

“아니요, 전 당신이야말로, 구시대적 표현이지만, 미스 유니버스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요.”

“진짜요?”


벨이 웃음기를 띠며 묻는 말에 히카루는 열변을 토했다.


“물론이죠!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찰랑거리고, 웃을 때 보이는 하얀 치열은 어떻구요! 더군다나 가슴 크고, 키도 크고, 총체적 글래머죠. 저도 당신처럼......”


히카루는 문득 자신의 실언을 깨달았다.


“정말 미안해요, 어......무조건 그것 때문에 좋아하진 않는다는 걸 알아주세요. 변명이 아니라......”

“알아요, 물론 그것 때문에 절 좋아하시는 건 아니겠죠.”


벨은 쿡쿡거렸다. 웃을 때마다 깜빡이는 눈이, 미끄러지는 머리카락이, 뷔스티에 속에 감춰진 조금 큰 가슴이, 반짝거리는 갈색빛 피부가, 어쨌든 모든 것이 대낮 햇빛 아래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아, 저게 그 식당인가요?’ 벨의 목소리가 귀에서 어른거렸다. 히카루는 자신이 스테이크를 정상적으로 먹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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