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솔직히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잭."



잭은 방금 막 전자레인지에서 꺼낸 따끈따끈한 크로크 무슈를 꺼내어 먹고 있는 와중이었다.  잭은 오물오물 거리며 치즈와 빵을 씹어 넘기기만 할 뿐 별 대답은 하지 않고 듣고 있었다. 토르비욘이 말을 이었다.



"지금 네가 그 험난한 대도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생하는 것도, 그 망할 상사 밑에서 죽어라 일만 했던 것도 말이지. 어쨌든 그만둔 건, 잘한 거야. 솔직히 넌 패션 쪽은 아니야."

"그건 그래요."



잭은 계속 듣고만 있자니 미안한 마음에 한 번 꿀꺽 삼킨 후 약간 목 멘 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친척은 특유의 주절주절 늘어놓는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패션에는 문외한이다만, 이건 욕은 아닌데, 넌 키만 멀대같이 컸지 몸은 딱히......그리고 넌 옷도 뭐 없잖니. 거기 회사 사람들이 별 말 하지 않던? 아, 하긴 별 말 할 위치가 아니긴 해. 그 상사 녀석은......난 말이지, 그러니까 그 뉴스를 봤을 때, 난 너한테 달려가 네 머리 위에 당장 내 집 앞에 쌓여 있는 눈더미를 퍼부어주고 싶었단다."

"이해해요."

"하지만 진심은 아니었단다. 그건 그냥 분노였어. 뭐랄까......'흠, 이렇게 사람 보는 머릿대가리가 없어서 어디 사회 생활이나 똑바로 하겠어?' 이런 기분이었지. 정말 이해하지?"

"흠, 제가 왜 오늘 전화를 걸었는지 아세요?"

"아니, 왜냐?"



잭은 남은 크로크 무슈의 모서리 조각을 입 안에 집어넣고 삼킨 다음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작은 협탁 위로 손을 뻗었다. 그가 그 위에서 집은 것은 한 손에 들어오는 책이었다. 그 책은 이미 여러 번 누군가가 읽어본 듯 책장이 바래져 있었다. 특이한 점은 하얗기만 한 소프트커버에 제목만 검은 글씨로 인쇄가 되어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마치 출판사에서 갓 나온 임시 제본판 같았다. 잭은 씨익 웃으며 그 책을 슬쩍 펼쳤다.


"그게, 제가 낸 책의 스웨덴판 출시날이 오늘이거든요. 서점에 가보시지 않겠어요?"


 





파리에서 그가 휴대폰을 던져버린 후로 이제 거의 1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세상은 많이 변했는데,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이나 건물들도 그랬지만 잭 모리슨에게는 아주 커다란 두 가지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는 자신, 두 번째는 가브리엘 레예스. 그는 잠시 기자가 되는 것을 미루기로 결심했다. 대신 밤낮으로 온갖 아르바의트를 하기 시작했다. 식당, 편의점, 마트, 심지어 그 힘들다는 택배도 해보았고 임시직으로 온라인 쇼핑몰의 프로그래머일까지 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항상 새로 장만한 휴대폰이나 노트, 또는 태블릿이 자리잡고 있었다. 밤잠을 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도중에 과로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완성을 갈망했다. 그렇게 7개월쯤 흘렀을까, 그는 아르바이트 도중 허락을 받고 미리 연락해둔 에이전시를 통해 출판사를 찾아갔고, 결국 그의 책은 세상에 나왔다. 'Soldier 76' 이라는, 아주 독특한 필명을 통해서 말이다. 


처음에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그 책은 'The Reaper Wears Prada' 라는 독특한 제목 탓일까, 먼저 여성들의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남성 패션계를 다룬 소설임이 알려짐에 따라 남성들도 가세하면서 서서히 판매부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흔하지 않은, 남자들의 패션을 다룬 이야기라는 요소와 함께 등장인물이 유명 패션잡지 '런웨이'의 편집장과 너무나도 유사하다는 말이 나오면서 급기야 잭에게 진상을 밝히라는 인터뷰 요청까지 들어왔지만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알아서 상상하세요.' 그것이 그의 답변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잭은 어느 날 아침 놀라운 기사를 신문에서 보게 되었다.



['런웨이' 편집장 가브리엘 레예스 내연 관계 밝혀......'곧 정리할 것']

[패션계의 대부, 자폭 스캔들을 일으키다]



그는 신문을 더 이상 읽지 않았다. 그저 접어둔 채 식탁 한쪽으로 밀어두었을 뿐이다.






스웨덴 친척의 쏟아지는 질문을 무시한 채 전화를 뚝 끊은 그는 출판사로부터 다른 연락이 왔을까 싶어 노트북을 켰다. 그는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로그인을 했다. 몇 개의 새로운 알림들이 떠 있었다.  스웨덴판 출시를 축하한다는 둥, 원고료가 조금 늘었다는 둥 일상적인 내용들이었다. 잭은 가장 최근의 알림을 클릭했다. 며칠 전에 도착한, 그도 모르는 사람의 메일이었다. 그 메일은 아마도 그가 쓴 소설의 팬이 보낸 듯 싶었다. 잭은 천천히 메일을 읽었다.  




안녕하세요, Soldier 76!


이 메일을 읽어주시면 정말 좋을 텐데, 왜냐하면 전 당신의 소설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모든 게 너무 럭셔리하고, 패셔너블하니까요. 남성 분도 이렇게 패션에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어요. 저는 정말 깊은 인상을 받았답니다.


근데 그거 아시나요? 


당신과 그 유명하신 가브리엘 레예스가 사귄 적이 있다는 사실, 전 알고 있는데!

이런 적 없으시겠죠,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저도 곤란해서.


오늘 밤 10시에 힐튼 호텔 로비의 5번 예약석으로 와주시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잭은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

"아니 그냥........"

"말 쉬었다가 하는 버릇은 여전하군."

"이름을 밝히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안 올 것 같았거든."

"나 그런 인색한 사람 아니에요!"



잭은 가죽으로 된 1인용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간신히 눌러 참았다. 그는 이 상황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눈앞의 사람은 더욱더. 짜증이 치밀어 오르지만 정작 거무스레한 피부의 남자는 작전 성공의 쾌감에 웃고 있다. 변하지 않았어. 정말이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짧고 살짝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톰 포드의 쓰리피스 수트, 구찌 벨트, 펜디의 로얄블루 체스터필드 코트, 지방시의 사피아노 레더 메탈 포인트 로퍼. 왼쪽 엄지에 까르티에 옴므 루비 골드 링, 오른쪽 손목에 에르메스 볼드 뱅글. 그래, 굳이 예약석이라고 한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눈에 안 띨 수가 있어?



"그래, 책을 썼더군."

"......내가 언제요."

"어디서 발뺌이야. 런웨이 사람들은 대부분 알아봤어. 필명을 쓰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입만 닫았을 뿐이지.

맞아, 그 오글거리는 필명은 뭐야? Soldier 76? 이제 군인으로 진로를 바꿨나?"

"제 예전 스타크래프트 닉네임이었을 뿐이에요. 읽어보기는 한 거에요?"

"어. 한 다섯 페이지쯤 읽고 너의 그 진부한 문체에 문학적 충격을 받아 기절할 뻔했는데, 다행히도 셀린느의 점프 수트 컬렉션이 생각 외로 뛰어나서 최악의 사태까지는 막을 수 있었지. 그런데 어째서 네 꼴은 영......"



레예스의 검은 눈이 갈색의 트위트 코트와 면바지, 흰 셔츠와 레이어드한 파란 니트의 잭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는 눈을 깜빡거렸다. 잭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영 아니라고요?"

"아는군."

"근데 이게 저한테 맞아요."



레예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그냥 이렇게 다닐려고요."



잭은 어깨를 으쓱했다. 잠시 레예스는 아무 말없이 금빛 원탁에 놓인 크림 뺀 라떼를 몇 모금 마셨고, 잭은 그저 눈앞의 고급스런 도자기 잔을 바라보기만 했다. 분명,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자기 앞의 사람도, 또한 자신도. 




"왜 그랬어요?"

".......뭐가."

"왜 그랬냐고."




어디선가 많이 들은 말인데. 잭은 기억을 되살리려 애를 썼지만 이미 희미해져 버린 것 같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졌지? 커피 너머, 도자기 너머, 비싼 명품 너머, 분수대 물 너머, 그가 흘렸던 눈물 뒤편으로. 그는 순간 레예스가 울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착각이었다. 레예스는 웃고 있었다. 


 

"그냥 내가 너무 웃기더라고."

"......"

"웃긴 게 뭔지 알아? 몇 백만 불짜리 옷, 구두, 반지며 팔찌......아니, 패션계를 주름잡는 내가 그 정도 스캔들에 벌벌 떨며 살아야 하는 게 스스로 우스꽝스럽더군. 그래서 그냥 자폭해버렸어. "

"후회......"

"안 해. 내가 언제 하는 거 봤어?"



잭은 그 대목에서 가만히 레예스를 응시했다. 레예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당신을 패션계의 황제로 추앙하더군요."

"그렇지."

"......어째서일까요?"

"그래, 어째서일까."



이상하게도 레예스의 말에는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는 후,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남들 모르는 애가 두 명이나 있어도, 내연녀가 있어도, 그래, 세상은 잘만 봐주더군. 물론 심판을 바랐던 것도 아니지만. 그게 놀랍단 말이야. 그래서......"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잭이 끼어들었지만 레예스는 무시했다.


"내가 편집장 자리를 내놓았거든."


잭은 동공이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설마."

"진짜."

"말도 안돼요!"



잭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고개를 이쪽저쪽 아무 의미없이 두리번거렸다. 그의 두 눈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그건......그 자리는 당신이 노력하고......또 노력한......"

"난 런웨이에 머무르지 않을거야, 나만의 잡지를 만들려고."



그러나 잭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뭐라고요?"

"나만의 잡지를 만들거야, 그래서 아주 유능하고 뛰어난 비서가 필요해."

"네......?"

"......뭐, 옷에 대해선 뭐라 안 할게. 다만, 일은 잘하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요,"



잭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아예 새로운 잡지를 만들겠다고요?"

"......그 사이에 머리가 나빠진 거냐."



레예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잭은 여전히 눈을 멀뚱멀뚱 뜨고만 있었다.



"너 어떻게 할래? 비서로 들어올래, 말래?"

".......제가요?"

"그래, 예전처럼."

"......예전처럼요?"

"......이상할 것 같아?"


레예스는 묵묵부답인 잭을 바라보았다. 곧 그는 머쓱했는지 그 시선을 잭 바로 옆의 이름 모를 그림으로 돌려버렸다.



"알아. 그래, 미안해. 싫으면......"



잭이 끼어들었다.



"괜찮아요."

"거절해도.....뭐?"



이젠 레예스가 말이 없어질 차례였다. 잭은 희미한 미소를 띠우며 차분해진 눈빛으로 레예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잭이 말문을 열었다.



"이걸 원한 거 아니었어요?"

"......"

"너무 쉽게 승낙해서?"

"......"

"맘대로 상상하지 마요. 아직 사귀어줄 마음까진 없으니까요."



잭은 이번에야말로 자리에서 일어날 때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휴대폰을 내던지지는 않을 것이다. 산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데다가, 분수대 물도 없다. 잭은 그저 미소 지었다. 눈앞의 사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당당함, 솔직함, 아니, 그것들을 넘어 아주 오만해져서 돌아오고 말았다. 그렇게 눈앞에 나타나고 말았다. 그리고 내치지 못할 것이다. 그 오만함마저 언젠가 품에 꼭 안아줄 수 있을 정도로. 



"......누가 그래 달래."



그러나 잭은 입만 삐쭉 내밀었을 뿐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트위드 코트를 몸에 걸치고 목례만 까딱했을 뿐 뒤돌아보지 않았다. 앞으로 맨날 보게 될 사람이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기분 좋게 올린 채로 바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조금 닳은 듯한 구두 굽이 대리석 홀을 울렸고, 그가 거의 매일 입다시피 하는 파란 니트는 조금 얇은 듯 싶기도 했다. 그래도 뭐 어떤가. 잭은 어깨를 폈다.



내일 스웨덴에 사는 그의 먼 친척에게 전화부터 해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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