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처음처럼,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멀찍이 떨어져 걸었고 단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그저 걸음만 옮겼다. 잭은 혹시 레에스가 무슨 말을 지 않을까, 질문이라도 하지 않을까 귀를 쫑긋 세운 채 그림자의 보폭을 맞추었지만 그건 기대와 오산에 불과했다. 잭은 서서히 깨달아갔다. 레예스는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잭이 일방적으로 내뱉은 이별통보로부터, 그 순간이 그의 귀로 흘러 들어간 때부터 이미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저 왔던 길을 되짚어 돌어왔다. 목적지나 경유지가 아닌 그저 시곗바늘을 뒤로 돌린 느낌, 그럼으로 인해 몇 시간 뒤로, 아니 몇 개월 뒤로 돌아간 느낌, 사실 그 짧은시간사이에 그렇게 가까워진다는 것이, 어쩌면 기막히게도 이상했다고 잭은 생각했다. 결국 이상한 우연들과 필연들이 얽히고 섥혀 만들어낸 괴상망측한 행복의 연속은, 너무나도 뻔해보였고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던 그런 끼어듦으로 한순간에 와장창 부서져 버린 것이었다.


잭은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온갖 회한과 상심과 망상이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넘기 힘든 산이 그에게 남아 있었다. 파리에서의 이틀이 남아있다. 이틀 동안은 비서직으로서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말을 내뱉어 버린 지금, 이제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건 순전한 계산 착오였다. 실수였다. 그는 조금 더 늦게 말을 했어야 했다. 이틀이 온전히 지나간 다음에, 뉴욕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 말을 뱉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언제나 그랬듯 아주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다음날 레예스의 일정은 라거펠트의 자선파티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잭은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리무진을 그와 동승한 채로 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스스로 자문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위치는 레예스에게 함부로 무얼 물을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그는 호텔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에, 내린 후에 로비를 걸어가는 동안에, 홀을 빠져나와 회전문을 통과해 차문을 열어 침을 꿀꺽 삼키기까지 내내 그 말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되게 늦는군."

"......죄송합니다."



이전과는 다른 어색함이 흘렀다. 기대를 안고 가는 어색함이 아니라, 독이 든 비수를 품고 가는 듯했다. 잭은 자신이 숨막혀 하지 않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리무진은 부드럽게 도로를 갈랐고, 창 밖으로는 이름 모를 분수대와 비둘기 무리들, 관광객들, 가로등이 보였다. 




침묵이 몇 분쯤 이어졌을까.  



"너 말야."

"......네?"

"왜 그랬어?"

"......예?"

"......왜 그런 말을 했어?"


잭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눈 둘 곳을 찾아 밖을 바라보았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게 너무나 난해해 보였고, 레예스의 목소리만 크디 크게 들렸다. 레예스가 말을 이었다.


"협박인가?"

"......"

"......기자? 파파라치? 아니면......"

"......"

"아름다운 여자?"


그 순간 잭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레예스가 무심하게 말했다.


"지금 네가 입은 거 프라다거든. 옷 입은 값 좀 해라."

"그, 그게 무슨....."

"뭐?"

"그,그게 무슨 상관이에요......내가 프라다를 입었든......페라가모를 신었든......아무것도 변하지 않아요! 당신은......"



잭은 창 밖에서 눈을 돌려 눈물 고인 시선으로 레예스를 노려보았다.


"그.....그런 명품 옷만 걸치면 완벽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잖아요! 그래봤자 당신은......당신은......"

"당연히 완벽하지 않지, 내가 언제 나 자신이 완벽하다고 했나?"


레예스는 그저 잭의 눈물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말했다.


"이건 자존심이야."

"무슨......?"

"왜 돈이 있든 없든 사람들이 명품에 집착하는 줄 아나? 그게 바로 살아가는 자존심이기 때문이지. 나는 아직 이 정도 유희를 즐길 여유쯤은 남아있다, 그것이 밍크코트든, 사피아노 가죽이든, 크리스탈로 장식된 하이힐이든 간에 그렇게 외칠 수 있는 당당함이라고. 물론 그게 사치라고 비판하는 자들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 또한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이라면 뭐라 할 수는 없지 않겠어? 잭, 넌 아직 모르는 게 많아. 명품 옷을 걸치든 말든, 패션에 신경을 쓰든 말든 달라지는 게 없을 거라고? 웃기지마, 나도 내가 누군지는 알아. 두 사생아의 아버지지."


잭은 할 말을 잊은 채 그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눈에서는 이제 고인 눈물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가 반복했다.


"어떻게......어떻게!"


레예스는 그런 잭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다르게 보았어. 그리고 젊은 시절의 나와 동일시했지. 모든 것에 열정적이었고 도전적이었던 그때의 나와 말이야. 지금도 넌...... 그렇지 않나?"

"아니요."

"넌 나와 같아."

"아니요, 전 당신과 달라요."

"잭."

"게이브."


잭은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비록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말라붙어 하얀 소금기가 남아있긴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고 오히려 단호했다. 레예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를 응시하고 있던 잭은 낮게 말했다.


"그 열정과 도전은 당신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에요, 게이브."

"......"

"당당해지세요, 이제."

"......"

"솔직해지고, 입을 여세요. 닫지 말아야 해요. 싫은 것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고요."

"......그럼 너는 어떻게 할 셈이지?"


잭은 문득 레예스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보았다. 자선 파티장이었다. 기자들, 카메라맨들, 스포트라이트, 레드카펫. 높다란 명성과 명예, 열정과 도전. 그리고 그 이면. 레예스가 물었다.


"넌 이런 삶을 원하나?"


그는 선글라스를 끼우면서 차문을 열고 내렸다. 함성과 불빛이 그에게 쏟아졌다. 잭도 멍하니 차에서 내렸다. 날은 구름이 꼈고 흐렸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파티장 문을 바라보았다. 기자들의 환호와 마이크에 답변하느라 바쁜 레예스가 보였다. 




일순간 잭은 씩 웃었다. 그리고 그는 뒤돌아섰다. 그가 걸어갈 수록, 파티장은 점점 멀어졌다. 페라가모의 소가죽 굽이 콘크리트 바닥과 부딪혀 소리를 냈다. 그 소리와 함께, 그의 코트 주머니 속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확인해 보았다. 레예스였다. 그는 큰 소리로 웃으며 옆의 분수대에 휴대폰을 던져버렸다. 




날은 흐렸다. 이제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 같았다.





***다음 화에서 완결이 날 것 같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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