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은 그녀를 보자마자 자신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사람.  그는 머릿속에 새겨지는 하나의 문장이  예전에 누군가 말했던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떠올렸고, 그녀가 그만큼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름답고, 또 아름답다. 갈색빛이 감도는 금발은 곱게 굽이쳐 어깨 밑에서 넘실거리고, 보랓빛 체크의 여성용 트위드 슈트는 목에 건 스와로브스키의 백조와 잘 어울렸다. 비록 다리는 식탁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오만하면서도 상대를 유혹하듯 부드럽게 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잭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와장창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비록 그 색깔은 북극해처럼 맑고 푸르렀지만, 잭은 알아볼 수 있었다. 생기가 없다. 마치 인형처럼. 죽은 사람처럼.




"잭 모리슨 씨."




그녀는 잭이 자리에 앉자 입을 열었다. 목소리 한 갈래가 비단실을 꼬아놓은 듯이 우아하고 흘러넘친다. 이런 여자에게 빠지지 않기란 솔직히 힘든 일이라고, 잭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썩은 동태 눈깔만 아니라면. 그는 속에서 욕지기가 나왔지만 꾹 눌러 참았다. 



"전 캐서린이에요. 그냥 그렇게 부르시면 되요."



가명이겠지. 뻔한 트릭이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에 대한 말은 들으셨나요?"

"죄송하지만 용건만 말씀해 주시겠어요?"

"어머."

"그 사람 성격 아실 텐데. 되게 제멋대로고 급한 거."



잭이 미소를 지으며 띠운 말에 그녀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마치 칠판을 긁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왜 그러세요? 오늘 잠자리 약속이라도 있으신가?"



잭의 입술이 일그러지자,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에요. 너무 심하게 반응하시네요."

"계속 이러시면......"

"알겠어요, 모리슨 씨. 용건만 말하죠."


그녀는 옆 의자에 놨던 핸드백에서 작고 얇은 갈색의 서류 봉투를 꺼냈다. 그녀는 잭에게 그것을 내밀자, 잭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가 물었다.



"이게 뭐죠?"

"열어봐요."



잭의 손이 봉투를 갈랐다. 그리고 그는 그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하자마자 간신히 관리하고 있었던 표정이 한 번에 붕괴해 버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눈으로부터 전해진 정보는 왜 그렇게 빨리 인식되는지. 그건 분명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두루두루 있을 터지만 지금 잭에게는 그저 나쁜 점으로 밖에는 비춰지지 않았다. 잭은 눈을 깜빡거렸고, 봉투를 책상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하지만 급히 아래로 감춘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망원렌즈는 천연기념물만 찍으라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눈앞의 여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맞은편 건물에서 찍었죠. 어때요?"

"......"

"......마음에 들어요? 당신과 그가 벌거벗은 채 서로 껴안은 모습이요."



진정해. 정신 차려. 진정해. 잭은 술이라도 마신 듯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를 붙잡으려 애썼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기도 하고, 강제로 마취제를 투여 받은 기분이기도 하지만 그는 물러날 수 없었다. 그는 느꼈다. 이것이 비서로서 수행할 마지막 임무가 될 것임을. 잭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원하는 건......"

"비서직을 당장 그만두고 그와 헤어져요."

"......"

"내게 용건만 말하라 하지 않았나요? 아니면 난 이 사진들을 당장 가십지 기자들에게 뿌려버릴 텐데?"



펜과 카메라를 들고 나대는 자들, 사회의 구성원 몇몇을 지옥으로 보내버리는 자들, 어찌 보면 방법은 단순하다. 현실적으로, 이성적으로 보아도 나쁘지 않고 오히려 안전하다.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치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다만......잭은 아래로 감추었던 손을 주먹 쥐며 물었다. 



"왜......이러는 거죠?"

"내가 그의 아내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얼음 같았다.


"하지만 당신은 그와......"

"결혼하지 않았죠. 동거도 안 해요. 그도 날 싫어하고, 나도 그가 싫어요. 하지만, 모리슨 씨. 내가 인정받지 못했고 앞으로 결코 인정받지 못할 거라고 해서 내가 물러설 이유가 뭐가 있죠?"



잭은 그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는 입가에서 바람 새듯 터져나오는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풋, 하고 웃은 그가 운을 뗐다.



"......돈 때문인가요?"

"잘 아시네."

"그것 때문에 젊은 날 그에게 접근했고요?"

"물론 그는 후에 나를 알고서 펄펄 뛰긴 했지만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그도 참 많이 변했죠, 나같이 뛰어난 미모의 여신이 아니라......그저 평범해 보이고.....게다가 부하 직원을 상대로 연애 행각을 하고 있으니......"

"......"

"어째서일까요?"


잭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상황을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하고, 어떻게 헤어져야 할지. 불분명하지 않아 더없이 좋았다. 이 지독히도 어두운 사회에 갓 발을 들인 그에게는, 지금의 이 깔끔한 상황이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나도 분명해서 기뻤다.



"사진 가지실래요?"

"......제가 가져봤자 의미 없으니 도로 가져가시죠."








"......아니 대체 뭘 찾다가 온 거야?"

"......그게 말이죠."



레예스의 호텔방에 도착한 잭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불평불만에 가득 찬 레예스의 얼굴과 마주해야했다. 도착한 시각은 밤 10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잭은 일부러 해맑게 대답했다.


"그래도 꽤 빨리 왔......"

"뭐가 빨리 와?! 한조 서포팅 하느라 바쁜 제시 불렀잖아! 내가 아무리 널 봐준다 해도 한계가 있다고. 파리에 왔다고 해서 너무 붕 뜬 거 아냐? 근데 뭘 잃어버린 건데?"

"그게....."

"뭐?"

"......갖, 갖고 온 낸시 곤잘레즈 숄더백을 통째로 길에 떨어트리고 말았.....

"잘한다, 잘해."

"......찾긴 찾았어요."



잭은 피곤한 듯 기지개를 쭉 펴는 레예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몇 시간 동안 인터뷰에 시달린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오늘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말하는 게 둘 모두에게 이득일 것이다. 잭은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라고 모기 소리만 하게 중얼거리고 휙 나가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도망치려는 그의 발목을, 레예스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지쳐?"

"네?"

"여긴 파리야. 야경이 뉴욕이랑은 비교도 안 된다고."




잠시 후 그들은 패딩과 목도리로 무장한 채 밖으로 나왔다. 잭은 웃음이 나오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레예스는 그런 잭이 꽤나 못마땅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만 좀 웃지?"

"패딩이잖아요."


잭이 푸흐흐 거리며 말했다.


"그 가브리엘 레예스가, 헤비 아우터라니!"

"난 잘생겨서 멋진 거 입고 길 걸으면 사람들이 몰려오거든."

"에이 설마."


잭은 반발하는 레예스의 말을 들으며 꽁꽁 맨 목도리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까만 눈을 보았다. 살풋 미소 짓고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걸었다.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된 건물들과 신호등의 조화는 말로 설명하기란 힘든 것이었다.  노란색 나트륨등 가로등은 그들이 걷는 길을 비추었고 그림자는 그라피티가 그려진 벽에 파문을 남겼다. 파리는 절대 깔끔한 도시는 아니었다. 곳곳에 버려진 신문지 조각들과 담배꽁초의 흔적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화려한 부와 문명의 빛깔들. 그 양극성이 대립하는 이 도시는, 어쩌면 패션계를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제 곧 해야 할 말들. 현실이 삽시간에 닥쳐오는 것을 느끼며 잭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때 레예스가 물었다.



"안 배고파?"

"네?"

"너 오늘 별로 안 먹은 것 같은데......평소엔 누텔라를 퍼먹었잖아."

"저도 이젠 다이어트를 할까 싶어서......"

"휴고보스 모델들 보고 깨달은 거야?"


레예스는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지 마, 살 안 뺀 게 더 나으니까."

"......진짜요?" 

"......몰라."



이런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해야 하는군요. 잭은 걸음을 멈추어 섰다. 미뤄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 언제나 그랬듯. 늘 모든 걸 성질 급하게 해치워 버리는 당신처럼, 나도 이젠 그럴려고. 아니, 최소한 당신을 대할 때는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최소한 당신에게 나쁘게 대할 때에는.





"......거기서 뭐해?"

"레예스."

"......"

"우리 말이에요,"

"......"

"헤어지죠."





***곧 완결 납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려요!(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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