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제시......"


잭이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조심 들어갔는데도 불구, 제시는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드라이 펌 헤어를 한 손으로 쓸어올렸다. 옆에서 한조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잭은 잠깐 문간에 서서 가만히 있다가 뚜벅뚜벅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그랬듯이 옆구리에 손을 척 올려놓은 제시는 갈색 눈을 깜빡이며 거드름 피우는 말투로 물었다.


"그래, 왜?"

"이번에 파리 패션쇼 있잖아요......"

"이런, '너와 같이' 패션에 대해서는 까막눈인 사람도 가는 건가?"

"뭐 저야 비서니까......"

"됐고, 이리 내봐."


잭이 제시에게 내민 종이는 다음 주에 열릴 파리 패션쇼의 일정표였다. 파리 패션쇼같은 세계적이고 거대한 행사에서는 늘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지만 오늘이 바로 그 변수를 정리할 마지막 날이나 다름없었다. 레예스의 군더더기 없는 태도는 당연하고 일주일이라는 기한, 새로운 디자인이나 컬렉션, 섭외는 응당 며칠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제시는 그걸 한조의 앞에 부드럽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쪽은, 준비 잘하고 있어?"

"늘 알아서 하는 편이니까요."

"그러니까 둘이 잘 하고 있냐, 난 그걸 묻고 싶은건데."


한조가 예상치 못한 시점에 끼어들자 순간 제시의 동공이 커졌다가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건 잭도 마찬가지였다. 제시의 얼굴은 붉어져있었고, 잭은 종이가 없어 텅 빈 손을 서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은, 요새 잭이 옷도 다시 잘 입기 시작하고-제시가 이를 부득 갈았다. 예전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야근 시즌이 지난 때도 계속 밤에 남고, 하여튼.....피곤하지도 않나요?"

"자기! 왜 그런 거에 신경쓰는 거야?"


제시의 말투에는 당황함과 분노가 묻어나 있었지만 그에 반해 한조는 아주 여유로움이 넘쳐났다.


"난 그저 너의 동료가 피곤할까봐....."

"정작 당사자는 상관없다고!"



잭은 허허 어색한 웃음기를 띠우면서 슬쩍 밖으로 나와버렸다. 사내연애 함부로 하는 거 아니라고 그 누가 말하던가. 한조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레예스는 그의 스타일을 신경써주기 시작했다. 물론 약간의 난관이 있었다. 처음에 레예스는 그에게 프라다가 기본이라며 프라다를 입히려고 했지만 그의 몸은 프라다의 핏을 따라가지 못하였고, 결국 레예스는 베이직한 아이템을 바탕으로 액세서리에 포인트를 주기 시작했다. 하얀 셔츠를 입고 있으면 빨간 토트 와치를, 검은 셔츠라면 화이트 슬렉스를 매치하는 식으로 가볍게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도 레예스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매일같이 잭에게 말했다.


"그래도 남자의 기본은 수트야. 수트라고. 알겠지?"


잭은 그가 수트덕후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빙그레 웃었다. 





여러 가지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잭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다. 제시는 요 근래 사무실 책상에 콕 달라붙는 대신 어디론가 휙휙 움직이고 있었는데, 잭은 그가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늘 궁금했지만 그의 거친 성격과 불안한 말투를 고려해 보면 감히 묻기도 그랬다. 제시는 수많은 전화를 받았고 문서를 날랐고 한조에게 윙크를 날리며 단백질 쉐이크를 들이켰다. 물론 이따금씩 들려오는 레예스의 불호령은 양념으로 친다 하고, 메인 디시는 파리 패션쇼였기에 제시는 그 많은 일들을 혼자 다 하면서도 너무나 신나 보였다. 자부심? 뿌듯함? 어쨌든 제시는 잭을 신뢰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이번 기회에 자신의 능력을 확실히 보여주겠다 결심해서인지 그 어느 때보다 불철주야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저러다가 쓰러지는 거 아닐지 모르겠어요."



잭은 한조에게 최종 레이아웃 필름을 내밀며 말했다. 한조는 긴 머리를 귀 뒤로 우아하게 넘기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도 먹을 거 다 먹어 가면서 일해요."

"그래도 같은 사무실 동료인데 전 좀 미안하죠, 절 싫어하고-예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절 믿지 않는다는 건 알겠는데, 저도 비서라고요. 뭐, 딱히 섭섭한 건 아니지만......"

"사실 그거 관련해서 참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잭은 한조의 까만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한조의 손은 타블렛 작업으로 바빠보였다. 그의 입이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뭐가요?"

"내가 저번에도 물었잖아요, 둘이 어떻냐고."



잭은 잠시 그 질문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이어서 하나의 의미말고는 다른 것이 없음을 깨닫고 대답하려다가 입을 꼭 다물었다. 그는 잠깐 고민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뭐가 말하고 싶은 건데요?"


한조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잭을 순간 응시했다가,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타블렛에 몰두했다. 그의 손에서는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습이 완성되고 있었다. 잭은 그 그림을 살짝 불만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봐요."

"그러니까 내 말은......"


잭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뒷감당 할 준비되어 있어요?"

"......예?"

"이 잡지사 내에서는 뭐 그렇다 치고, 솔직히 잡지사 내에서도 그걸 아는 사람들이 레예스랑 친하게 지내는 몇몇 밖에 안되거든요. 아니다, 정정하면 '친하게' 가 아니라 '같이 일하는' 이라고 해야 겠네."


끝의 한 문장은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다. 잭의 파란 눈이 약간 커진 것을 본 한조가 펜을 놓고 양손을 깍지 끼고 턱을 받쳤다.


"혼내는 것도, 비난하는 것도 아니에요. 다만 나는 걱정스러운 거지. 이제야 사회 생활을 시작한 햇병아리 같은 사람이 말 한 마디로 세계 4대 패션쇼의 날짜마저 바꾸어 버리는 그런 사람이랑 아주 중요한 관계인데, 잭, 당신은 아직 모르죠? 언론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

"그들은 이 사회를 지키는 정의에요. 그리고 이 사회의 구성원 일부를 지옥에 빠트려 버리는 짓도 하죠."

"......"

"조심하라고. 파리에서 봅시다."


한조는 타블렛 전원을 탁 끄더니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유유히 사무실에서 빠져나갔다. 잭은 할 말을 찾지 못한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며칠이 흘렀고, 잭은 차 안에서 파리의 야경을 보고 있었다. 그는 불어를 읽을 수 없었기에 길거리의 표지판 역시 그에게는 그저 난해한 어구들이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온갖 건물들, 나무에 파리 패션위크를 기념하면서 매달아 놓은 전등들, 고전적인 발코니와 그들을 비추는 주황빛과 노란빛의 하이라이트들, 잭은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멋져요!"

"옷이나 신경 써. 구겨진다."



옆에서 레예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잭은 빙긋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말투와는 다르게 입가는 미소를 참고 있는 듯했다. 잭이 말했다.


"좋죠? 멋지죠?"

"됐어. 지금 네가 입고 있는 거나 신경 쓰라니까. 카메라 앞에 나갈건데."

"아니 참....."


하기야 원래 그런 성격이지. 잭은 어깨를 으쓱하고 지나가는 풍경 하나하나를 눈에 담기 위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쇼는 화려했다. '화려하다' 라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잭은 내리자마자 번쩍이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했는데, 그가 놀라 움츠러들자 레예스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 지금 네가 입고 있는 건 버버리의 트렌치 코트와 톰 포드 쓰리피스야. 그렇게 걸어서야 폼이 나겠어? 얼굴 붉히지 말고."


잭은 앞장서서 걸어가는 레예스를 바라보았다. 펜디의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을 입고 레드카펫 위를 걸어가는 그는 마치 모델 같아보였다. 잭은 숨을 한 번 내쉬고 걸음을 옮겼다. 페라가모 스트레이트 팁의 소가죽 굽이 갑자기 가벼워진 듯했다.





"항상 이래요? 항상?"


잭이 울상을 지으며 물었고, 레예스는 무감각하게 대답했다.


"어. 항상 이랬어."



쇼가 끝나고, 잭의 얼굴은 얼굴 붉히지 말라는 레예스의 말과는 반대로 완전히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간에 펼쳐진 아자로의 컬렉션 때문이었다. 잭이 항변했다.


"아자로는 드레스를 만드는 브랜드지 란제리를 만드는 곳이 아니잖아요!"

"대체 그 나이가 되서도 이런 거에 민망해하면 어쩌자는 거야?"

"아니 여자 모델들이 막 걸어나오는데, 난 바로 그 밑에 있었.....아 몰라요!"


레예스가 픽, 하고 웃었다.


"그래서, 좋았어?"

"뭐요?"


잭은 자기 변호를 하려했지만 이미 인터뷰를 하려는 기자들이 레예스에게 밀려든 후였다. 그는 뒤로 밀려났는데, 그때 제시가 사람들 틈에서 불쑥 나타났다. 잭이 반가움에 외쳤다.


"제시!"

"작작해, 지쳐 죽겠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드라이 파마가 거의 풀어진 모양새를 보니 상당히 지쳐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잭이 물었다.


"한조는요? 둘이 늘 붙어있잖아요."

"멍청아, 그도 유명한 패션 에디터라고. 인터뷰 중이거든! 그건 그렇고......"


제시는 그에게 아주 꼬깃꼬깃한 종이를 내밀었다.


"받아."

"뭔데요?"

"낸들 알겠니? 어떤 금발 여자가 너한테 전해주라고 하던데?"


잭은 그 종이를 집는 순간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스포트라이트 한가운데서, 버버리와 톰 포드와 페라가모의 절묘한 조화 그 안에서, 그는 이상하리만치 가혹한 추위를 느꼈다. 잭은 문득 그 종이를 찢어서 불에 태워 버리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게 몇 초동안 이어졌을까. 제시의 목소리에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이봐, 이봐! 괜찮아?"

"......네?"

"......아냐."


제시는 그 말을 끝으로 황급히 가버렸다. 잭은 잠시 종이를 내려다 보다가, 그것을 펼쳐보았다. 휘갈겨쓴 검은 필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엉드헤 마제 가, '루 코브' 로, 오늘 저녁 9시까지 와주세요.



잭은 여전히 기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레예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일은 그 혼자 처리해야 할 것이며 그 결과 또한 가혹할 것이다. 잭은 기자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레예스!"

"......아무래도 프랑스 패션은 좀 더 스트리트에 가까운......왜?"


레예스가 얼굴을 찌푸렸지만 잭은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물건을 잃어버린 게 있어서 좀 늦게 돌아갈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뭐?"


레예스는 잠깐동안 잭을 어이 없다는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곧 그는 인터뷰를 계속했다. 잭은 레드카펫이 아닌 그나마 후미지고 사람이 적은 후문을 택해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조차도 위험할 것이었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줄이고 싶다는 아주 자그마한 희망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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