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상야릇했던 밤 이후로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흘러갔다. 사실 언제나 빠르게 흘러가는 나날이긴 했지만, 잭은 사무실에서는 일에만 정신을 쏟았고 그것 외에는 마음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건 일종의 현실도피 또는 부정,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밤은 일단 대충 잘 넘어갔다고 치자. 그러나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제시의 시선과, 제시에 잇따른 한조의 시선과, 소문이 어떻게 퍼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뒤에서 수군수군거리는 직원들의 속삭임을 그가  무시하기란 상당히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면, 이런 어이 없는 상황과 무책임한 일을 저지르고 난 와중에도 그는 행복하고, 또 무지 즐겁다는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말이죠."



그들은 잭의 아파트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침대 위에 누워있었고 그러나 벗은 건 아니었다.  레예스는 (잭은 사적인 공간에서는 그를 애칭인 '게이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얇은 소설책을 보고 있었고 잭은 옆에서 쫑알쫑알 떠들어대고 있었다.



"휴가를 좀 주셔야 할 거 아니에요. 휴가. 이건 아주 정당한 요구에요. 

"근데 솔직히......"



레예스가 책장을 넘기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넌 지금도 놀고 있잖아."

"오늘은 주말인데요, 게이브."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고맙게 생각하지?"



그 말에 잭은 혀를 삐쭉 내밀더니 몸을 좌우로 살짝 흔들었다. 레예스가 그런 그를 곁눈질했다. 잭이 물었다.



"혹시 지금 내 눈치를 보는 건가요?"

"아니, 상사 앞에서 혀 내미는 네 불경스러운 태도를 나중에 인사 시즌 오면 참고할려고."

"설마!"


잭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시늉을 했다.


"휴가 좀 졸랐다고, 혀 좀 내밀었다고 날 자를 셈인가요?"

"됐고,"


레예스는 하품을 하고 책을 탁 덮더니 침대에서 나른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입 심심해. 냉장고에 뭐 없어?"

"어이구, 우리 상사님께서 먹을 걸 다 찾네요."


벌떡 몸을 일으킨 잭이 종종걸음으로 부엌 냉장고 쪽을 향해갔다. 그가 부엌에서 침대 머리맡에 몸을 기댄 레예스에게 외쳐 물었다.


"빵에 누텔라 어때요?"

".....다른 거."

"......냉동 피자!"

".....다른 거."

"롤케이크!"


결국 레예스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그가 나이트가운 자락을 끌며 냉장고 앞에 도착했을 때는 잭이 이미 식빵에 누텔라를 듬뿍 듬뿍 발라 한 입 베어 문 와중이었다. 레예스가 그런 그를 보고 한심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네 냉장고에는 죄다 지방덩어리밖에 없냐?"

"살찌면 뭐 어때요."


잭은 슬쩍 스타워즈 티셔츠 자락을 들어올려 자신의 배를 내려다 보았다. 통통했다. 그는 민망함을 무마하려는 듯 빙긋 웃었다.


"나중에 빼죠, 뭐."

"그 말을 한 달 전에도 한 것 같은데."


레예스가 차가운 손가락 끝으로 잭의 통통하고 하얀 배 끝을 살짝 찌르자 잭이 우앗하는 작은 비명과 함께 급히 티셔츠를 내렸다. 그가 중얼거렸다.


"변태."

"뚱뚱보."

"너무 마르면 그것도 보기 안 좋아요."

"너무 살찌면 그것도 보기 안 좋거든? 넌 지금 네 금발과 흰 피부와 서글서글한 성격을 믿고 있는 모양인데....."


레예스는 잭을 위아래로 훑어보고선 한 마디 툭 내뱉었다.


"한 방에 훅 간다."

"그래도 우리 잘 때는 내 뱃살 좋아하잖아요. 마시멜로 같다고 말한 장본인이 누구더라?"


잭의 직격타에 레예스의 귀와 목덜미가 일순간 불에 데워지는 듯 빨개졌지만 그는 차분하게 잭의 냉장고를 뒤졌고, 곧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냈다. 좀 해묵은 듯 보이는 샐러드용 양상추와 아스파라거스, 토마토였다. 레예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고, 잭은 그 채소들을 그의 손에서 쏜살같이 뺏어갔다.


"이게 있는 줄은....몰랐어요!"


그의 말투에는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소년같은 천진함과 당황함이 동시에 묻어있었다. 레예스가 말했다.


"채소 안 먹는 줄은 아는데.....유통기한은......신경쓰지?"

"아, 당연하죠. 당연히 신경쓰죠."





결국 레예스도 잭과의 누텔라 티타임에 참여했다. 티타임이라고 해봤자 음식은 냉장고에서 갓 나온 차가운 식빵 조각과 말 그대로 누텔라 잼 뿐이었고 음료는 잭이 찬장을 뒤져서 찾아낸 인스턴트 커피였지만 말이다. 레예스가 달달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자 잭이 변명하듯 말했다.


"난 단 게 좋아요."


레예스가 수긍했다.


"그런 것 같다. 지금 내 입 안에 있는 모든 게 달거든."

"행복해지는 것 같지 않나요?"


잭이 파란 눈을 반짝이면서 묻자 레예스는 식빵 조각을 조금 베어물더니 우물거렸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잭은 시선을 슬그머니 돌렸다. 


"내가 괜한 걸 물은 건 아니겠죠."


레예스는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괜찮아."

"그냥, 좀 그런 것 같아서....."

"난 행복한데 뭘."


레예스는 식빵을 한 입 더 먹더니 꿀꺽 삼키고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잭을 향해 말을 이어나갔다.


"내 앞에 누텔라 있고, 그걸 바른 식빵이 있고, 내가 그걸 먹고 있고, 게다가 좋아하는 사람까지 있는데 과분한 거 아닌가?"

"오."


잭이 내뱉자 레예스가 반문했다.



"뭐가?"

"로맨틱해서."


잭이 멍하니 눈만 깜빡이자 이번에 레예스가 슬그머니 시선을 창문으로 돌렸다. 날은 조금 흐렸다. 그러나 비가 쏟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고, 곧 레예스가 그 침묵을 깼다.


"휴가.....말인데."

"네?"

"생각해봤어, 휴가는 아닐 수 있지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휴가 아닌 휴가라니?"


레예스는 부루퉁한 잭의 얼굴을 무시하고 말투를 사무적으로 바꾸었다.


"곧 파리 패션쇼가 열려. 어차피 넌 거길 가게 될 거란 말이지."

"저도 알아요. 그런데요?"

"거기 가서 업무 겸, 휴가 겸......그렇게 해."

"그게 뭐에요?"


잭은 억울한 얼굴이었다. 레예스는 다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비가 오지는 않을 날씨였다. 잭은 앞에서 무어라 계속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그는 영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조금 흐린 날에, 칙칙하고 빨간 벽돌 건물들에, 먼지 낀 유리창, 누텔라, 식빵 조각들. 그저 그런 순간들.








***오늘은 갑자기 글 분량이 반토막이 된 것 같네요. (착각인가?)

    새해에는 기분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빕니다!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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