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잭 다니엘스를 사오라고 한 줄 아나?"


몇 모금에 벌써 취해버린 잭의 귀에는 레예스의 말이 웅웅거리는 벌떼들의 합창처럼 들렸지만, 잭은 의자에 앉아 상체의 중심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와중에서도 고개는 일단 위아래로 끄덕였다. 경험상 무언가를 알든 모르든 레예스의 앞에서는 무조건 아는 척이라도 해보는 게 낫다는 걸 경험으로 체득한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네가 잭 모리슨이잖아."

"...그러쵸, 네에에....."

"음, 사실 별 의미 없어. 그나저나 벌써 취했나? 아니지, 나도 취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레예스는 잭이 몇 모금 마시고 남긴 술을 병째로 들이켜 버린 것이었다. 그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나는 술버릇이 좋지 않아."

"......저도요."

"대체 왜 그래? 아냐, 아냐, 대답하지 마."


레예스의 발음은 정확했지만 문장의 순서나 인과 관계는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잭은 자꾸만 픽픽 쓰러지려는 몸을 의자 위로 잡아 끄려 애쓰며 평소보다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하나 무러바도 되여?"

"뭐?"


레예스는 자기 병의 마지막 남은 잭 다니엘스 한 모금을 마셔버리고는 병을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갈색의 병은 다행히 깨지진 않았지만 처량하게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 모습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잭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애들, 애들,"

"애들이 뭐?"

"이름....."


그 말에 레예스는 셔츠의 가슴 포켓에 손을 집어넣었다. 끌려나온 것은 자그마한 사진이었다. 그는 잭에게 책상 위로 사진을 내밀었다. 잭은 흐릿한 시야로 그 사진을 내려다 보았다. 이제 초등학생쯤 되어보이는 두 아이였고 두 명 다 딸이었다. 레예스와 같은 흑발이었으나 피부는 그의 것보다 훨씬 하앴다. 잭이 중얼거렸다.


"와우."

"왼쪽이 엠마누엘이고, 오른쪽이 안나야."

"이름 못 지었다! 촌스러!"

"어쭈, 까불어?"


잭은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서 한마디 했다.


"귀엽네."

"그야 당연하지. 누구 딸인데."

"무슨! 엄마가 되게 미인이겠는데?"



레예스는 따로 반박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인이었지. 나는 그냥 멍청한 놈이었고."

"뭐가?"


잭이 반문하자 레예스는 책상 위로 몸을 숙이더니 눈을 깜빡이면서 잭을 빤히 바라보았다. 잭도 그를 빤히 마주 보았다. 술 취한 두 명의 남자가 서로를 헤벌레 응시하고 있는 모습은 꽤 볼 만했다. 레예스가 재차 말문을 열었다.


"그게 말이지, 내가 젊었을 적에.....패션 에디터로 일했었어."

"근데?"

"난 젊었거든. 젊었다고. 지금 너처럼. 너 낮에 나한테 버럭버럭 소리 질렀지? 그때처럼. 혈기왕성했고, 겁도 없었고, 거칠 것 없었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드라마나 노래에 나오는 그런 희망찬 삶, 진정한 사랑."


그 대목에서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마지막 말을 반복했다.


"진정한 사랑."


레예스는 잭에게서 눈을 떼더니 고개를 숙이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젊은 시절의 나는 열정적이었고, 유명했어. 그래서 파티에 갔지. 그리고 한 여자를 만났어. 영화에나 나올 법한 몸매에다 얼굴, 목소리, 드레스......어쨌든 완벽했지. 나와 그녀는 대화를 했고, 술도 마시고, 춤도 추고,그리고 밤엔......그래, 일을 치른 거야."


이제 레예스는 책상에 완전히 엎드려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서서히 흐느끼고 있었다. 잭은 그의 흐느낌이 짙어지는 동시에 자신의 술기운이 조금 깨는 것을 느꼈다. 잭은 차가운 손을 내밀어 그의 등에 갖다댔다. 그 등이 왜 그렇게 넓어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너무 짐이 많아서였나. 잭은 입을 다물고 레예스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는 울고 있었다.


"나, 난......너무 무서웠어. 쌍둥이를 얻었을 때......그녀가 나한테 그 사실을 알렸을 때, 그러면서 나를 협박할 때, 기자들한테 전화만 하면 다 끝장이라고......내가 쌓아온 명성, 명예, 내가 가게 될 자리......그 아이들은 내가 아빠인 걸 몰라. 자기들을 키워준 보모가 자기들 엄마인 줄 알고, 나는 그저 친척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 아이들을 얻게 된 걸 후회하는 건 아냐.....난......행복해.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말이야. 근데 그거 알아? 이게 밝혀지면 무너질 것들이 두렵고, 그걸 두려워하는 내 자신이 역겹고, 내 아이들은...... 그 아이들이 펜들고 카메라 들고 나대는 그 개새끼들을 무슨 수로 상대한단 말야? 그 아이들이 무슨 죄라고? 내 아이들이......"

"진......진정해요, 레예스."


잭은 자꾸만 꼬부라지려는 발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당신은 최선을 다한 거잖아요."

"잭, 잭, 나는,"


레예스는 그간의 심정을 오늘 다 털어버리려는 듯 다급한 어조로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황급히 고개를 치켜든 그의 검은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널 보면 내가 떠올라.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 말야. 나한테 그 누구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조언해 주지 않았어. 그건 어떻게 보면 좋은 거지만 나쁠 수도 있어. 왠지 알아? 잭, 너는 네가.....네가......"


레예스는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바람에 소금기 어린 눈물방울들이 책상 위에 투두둑 떨어졌다. 잭은 어느새 그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스웨터가 눈물로 축축히 젖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실컷..... 우세여. 오늘 다 푸러버리자거여. 아,술 더 사올까여?"



잭은 레예스를 잠깐 품에서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가 답했다.



"응, 다 잊고 싶어."

"알았어여."


잭은 휘청거리는 다리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는 몇 분간 낑낑 댄 끝에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몇 분간 더 그 이유를 고민한 끝에, 자신이 못 일어나는 이유는 레예스가 그의 팔목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잭이 말했다.


"놔주세여!"

"왜?"

"술 사와야 하자나여!"

"근데 내가 왜 너를 놔?"

"가야 하니까."

"그럼 가지마. 여기 있어."

"......또 자기 맘대로."

"뭐?"

"자기 맘대로 한다구!"

"까분다?"


실랑이가 벌어졌다. 놔주지 않으려 하는 자와 벗어나려는 자. 스탠드 하나를 켜두고 뉴욕 시의 야경을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형광등 삼아 벌어진 술판에서 그들은 말없이 낑낑거리며 팔싸움 비슷한 무언가를 벌였다. 비록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웃기는 일이겠지만, 최소한 그들은 매우 진지하게 그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순발력이 뛰어난 잭이 레예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듯 했지만, 후반부에 접어들 수록 완력이 센 레예스가 우위를 점해가고 있었다. 게다가 술까지 먹은 상태라 힘이 평상시보다 세진 상태였다. 레예스가 손에 힘을 꽉 쥐자 잭은 결국 투정을 부리고 말았다.


"아파여, 아프다구여!"


그 말에 레예스는 깜짝 놀란 듯 잭의 팔목을 갑자기 놔버렸고, 잭은 그 반동에 어어어 하는 소리와 함께 우당탕 뒤로 넘어졌다. 레예스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괜찮....."


그러나 레예스도 술에 취한 상태라 잭과 함께 넘어진 의자에 발이 걸려 같이 쓰러지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잭의 위로. 잭의 몸 바로 위로. 잭은 놀라서 흡, 하면서 숨을 들이쉬었다.


"왜.....?"

"......"

"그러지 마......"





나는 술버릇이 좋지 않아.





그 말이 이상하게 귓전을 울렸다. 







***연말이네요. 언제나 힘들지만..... 마지막 스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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