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잭은 평소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출근길에 나섰다. 그의 눈에 쌀쌀한 아침 공기가 감도는 뉴욕은 평화로운 날을 안고 깨어난 대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전쟁터처럼 보였다. 이유는 그러했다. 보풀이 잔뜩 일어나고 촌스럽게 보일 수 밖에 없는 오렌지색과 초록색의 체크무늬 스웨터는 그렇다 치고, 간밤의 그의 귀가 들어버린 대화와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레예스의 얼굴과 그로 인해 닥칠 여파는 그의 조그마한 머리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렇다. 인간의 공포는 그 상상이 원천이라 했으나, 그 상상마저 뛰어넘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면, 그 이후에는 어찌 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는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일부러 평소보다 많은 양의 필라델피아 크림치즈를 베이글에 발랐고 평소보다 많은 양을 한입에 십어삼켰으며 덕분에 목이 메어 눈물이 맺힌 채로 생수를 들이켜야 했지만 그것은 그가 앞으로 맞이해야 할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사무실에 도착한 잭은 그가 도착하자마자 제시가 내미는 A4용지 한 장을 받아야만 했다.



"이게 뭐.....?"

"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레예스가 나한테 팩스로 네게 할 일을 적어서 보내줬던데?"



오로지 잭을 괴롭히는 데만 골몰하던 제시조차도 그를 동정하는 말투였다. 잭은 재빨리 고개를 흔들고 종이를 내려다 보았다. 맙소사. 목록은 이러했다.



-오늘 안에 마치지 못하면 해고임-


프라다에서 여성용 파이오니어 백 찾기

페라가모에서 방말 벨트와 리뉴얼된 지니백과 내가 맡겨놓은 구두 찾아오기

지미 추에 가서 신데렐라 구두의 사진을 찍어오기

톰 포드 슬리브리스 재킷 치수 재오기

켈빈 클라인가서 15호 스커트 20벌 가져오기

펜디의 쇼룸에 가서 내가 점찍어 놓은 백팩 가져오기

코치에서 스네이크 크로스백 직접 매서 테스트하고 오기

마놀로 블라닉에서 펌프스 힐과 스웨이드 슈즈 각각 30켤레 가져오기

.

.

.

.


타라 덩컨 다음 시리즈 사 가지고 오기 (미출판 원고임)






"이걸 오늘 다 해요?"


잭이 영혼 없는 목소리로 묻자 제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잭은 침을 꿀꺽 삼키며 머릿속으로 뉴욕 지도를 그렸다. 어디를 먼저 가야 빨리 마칠 수 있을까. 그리고 아까는 대충 보았던 '미출판 원고임'이 눈에 들어 왔다. 잭은 눈을 깜빡 거렸다.


이걸 어떻게 구하란 말이지?






"....가브리엘 레예스 씨, ......네, 런웨이 편집장이요! 네, 어떻게 안 될까요!"



가방과 구두와 스커트가 잔뜩 담긴 종이 가방들을 어깨와 목에 감아 맨 잭이 횡단보도를 위태롭게 달리며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길거리의 차들도 그에게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잭은 후다닥 맞은편 길가로 뛰어갔다.


"제발, 부탁이에요, 세계적인 분이잖아요. 네? 타라 덩컨..... 여보세요? 젠장!"


가방들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거리의 사람들은 그를 보고 놀라서 자동적으로 비켜났다. 잭은 그 와중에도 '죄송합니다, 미안해요' 라는 말과 함께 스테이크 전문점으로 달려갔다. 점심 시간에 스테이크 준비, 그 역시 임무 중에 하나였다. 잭은 다시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타라 덩컨 새 시리즈요, 어떻게 안... 안 된다고요? 극비라고요? 어째서요? 이건 가브리엘 레예스 부탁이라고요!"


전화는 끊겨버렸다. 잭은 욕을 내뱉으며 포장된 스테이크를 받아 들었고, 불행 중 다행으로 달려오고 있던 택시를 잡아탔다. 그는 딱 맞춰 사무실 앞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몇 백만 달러는 할 가방들을 쓰레기 버리듯 내려놓은 잭은 비틀거리며 스테이크를 레예스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심장이 떨어져 나가기 직전이었다. 때마침 레예스가 들어왔다.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둔 얼굴로 그의 책상 앞에 주저 앉은 잭을 보더니 비웃음이 가득히 담긴 어조로 물었다.


"잘하고 있는 것 같군. 그런데 타라 덩컨은 구했나?"

"....."

"내가 왜 그걸 구하라고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당신 애들 때문이겠지. 잭은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아 책상에 앉아 있는 제시만 아니었어도 그 말을 내뱉었으리라 자신하며 대신 속으로 중얼거렸다. 레예스는 손목시계를 힐끗 하더니 말했다.


"아 참, 그 말을 깜빡했군. 점심은 라거펠트와 함께하기로 했어. 스테이크는 필요 없어. "


레예스가 뒤돌아 섰다. 잭은 산소 부족과 이산화탄소 과다로 시야가 흐릿한 와중에도 두뇌가 서서히 차오르는 분노로 인해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이륙 준비를 하는 비행기처럼,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뱅글뱅글 돌듯이, 그의 두뇌와 입은 멀어지는 레예스의 등을 이륙 신호로 하여 렌딩 기어를 올리려 하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조종간을 잡아당겼다.


"이봐요, 레예스."


그 건방진 말투에 레예스가 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러나 시선까지 돌리지는 않았다. 잭은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내가......뭘 .....잘못했는지.....알고 있어요.....하지만......이건 아니죠......난 당신 비서지, 당신 노예가 아니야......그래, 난 당신이 그렇게 감추고 싶어했던 걸 알았어......근데.....뭐? 라거펠트하고 밥 먹어야 한다고.....타라 덩컨? 당신은 그저 나를 자르고 싶은 거지?"

"그럼 때려쳐."


레예스가 갑자기 뒤돌아섰다. 그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때려치라고!"

"안 때려쳐요!"


잭은 헉헉거리며 일어나 맞대응했다. 그는 무릎을 짚고 눈을 찡그렸지만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긴 내 첫 직장이고, 내 월세를 내줄 곳이고, 내가 노력해서 지금까지 다녀온 곳이니까요. 그래요, 나는 패션에 조예라고는 없고 식스팩은 고사하고 배만 축 처진 뚱뚱보일지도 모르죠, 근데 그거 알아요? 내가, 이곳에서, 살아남으려고, 되게, 노력했다는 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닫혔다. 레예스가 나간 것이다. 잭은 숨을 몰아쉬며 다시 주저앉았다. 자신을 곁눈질하는 제시의 갈색 눈이 언뜻 보였지만 무시했다. 그를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그 날만큼 빠르게 흐른 하루가 없었다고, 다시 종이 가방들을 한 아름 껴 안고 사무실로 돌아온 잭은 생각했다. 결국 타라 덩컨은 구하지 못했다. 그는 해고될 것이다. 잭은 마음 한 구석에서 시원함과 씁쓸함이 동시에 들었다. 제시와 한조의 사이에 껴서 어떻게든 레예스의 눈에 들어보려고 했던 과거의 자신이 웃기기도 했고 인정받고 싶다는 과도한 욕구 때문에 생겨난 모든 일들이. 그래, 전부 나 때문이지. 잭은 마지막 종이 가방을 잘 접어 정리하고 종아리를 문지르며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잘 있어요, 제시."

"......응?"


제시는 그답지 않게 깜짝 놀란 말투로 되물었다. 잭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나 잘릴 거에요."

"......"

"짧은 시간이었지만, 뭐, 고마웠어요."

"......"

"서로 미안한 게 있다면 그냥 넘어가자구요. 난......솔직히 너무 지쳐서, 집에 돌아가야 할 것 같거든요."

"......잭, 잠깐만."

"......?"



잭은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제시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제시는 완전한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하얀 표지로 되어 있고 제본까지 완벽한 '타라 덩컨'을 그에게 내밀고 있던 것이었다. 잭이 놀라 반문했다.



"어떻게?"

"......이건 절대로 네가 좋아서 해주는 일이 아니야."


제시가 잭의 흔들리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난 네가 내 눈치를 봐서 한조의 도움도 이제는 받지 않는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셈셈이라고. 알겠어?"

"어디서 구했어요?"

"한조의 동생이 불법 텍스트본을 종종 사고팔곤 하는데, 그 녀석 여자친구가 동인지 작가거든. 제본을 좀 해줬지.


잭이 멍하니 서 있자, 제시는 그의 손에 책을 들려줬다. 잭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자 제시가 그를 재촉했다.


"난 퇴근할테니 어서 가봐, 어서!"





잭은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레예스는 평상시와는 다르게 스케치북이나 화보집, 다른 자료들을 보는 게 아니라 사무실의 큰 창을 통해서 뉴욕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 풍경에 너무나 심취한 나머지 잭이 안에 들어선 것도 모르는 듯했다. 잭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불러야만 했다.


"레예스?"


그러자 레예스가 급히 의자를 뒤로 돌리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아직 안 갔나?"

"그게......"


잭은 타라 덩컨을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레예스의 검은 눈이 몇 초간 그 책에 집중되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잭이 말했다.


"오늘은 한 권밖에 못 구했어요. 더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구해다 드릴테니."

"......"

"일단 그 종이에는 몇 권을 구해와야 하는지에 대한 조건은 없었으니까요, 괜찮죠?"

"미친 놈......"


레예스는 허탈한 말투였다. 그러더니 그는 곧 호탕하게 웃었다. 잭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가 웃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렇게 웃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비웃는 것은 봤어도, 그렇게 진심으로 웃는 것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레예스는 짧게 자른 앞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툭 내뱉었다.


"됐어, 가봐."


잭은 얼떨떨한 얼굴로 나왔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다시 들어갔다. 레예스의 얼굴에는 아직도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재밌다는 어투로 물었다.


"왜?"

"있잖아요,"

"뭐, 빨리 좀 말하지?"

"도움을 주는 사람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더라고요."


그 말에 레예스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 잭은 천천히 말을 마쳤다.


"저도 그렇게 타라 덩컨을 얻었거든요. 의외의 도움으로....."

"......"

"그러니까 꼭 숨기려고만 하지 마세요."

"그게 다야?"

"그게 다에요."




잭은 다시 등을 돌려 걸어나왔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오늘 하루도 왠지 모르게 잘 마무리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일단 그때까지는.


"잭!"

"네?"


안에서 레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업무 두 개 추가하지. 하나, 밖에서 잭 다니엘스 두 병 사오고, 둘, 오늘 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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