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멜 마끼아또는 열량 폭탄인데."


잭은 한조의 뼈있는 중얼거림에도 아랑곳않고 커피를 쭉 들이켰다. 한조는 그런 잭을 보고 고개를 살짝 젓고선 레모네이드를 조금 마셨다. 그가 물었다.


"날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뭡니까?"

"그게요, 한조. 부탁이 있어서 그래요. 부탁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잭은 한숨을 푹 내쉬고 함부로 감지하기 어려운 짜증이 담겨 있는 한조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카페의 잔잔한 딥하우스 음악이 흘러나오는 와중, 그는 검디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동양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한조가 의심 어린 말투로 질문했다.


"뭡니까."

"......나 이제 당신의 도움을 받지 않기로 했어요."


잠시 어색한 고요가 흘렀고, 띵띵거리는 하우스 음만이 들렸다. 먼저 그 침묵을 깬 쪽은 한조였다.


"......미안하지만 인과 관계가 전혀 성립이 안 되는데요?"

"제시가 나를 냉대하는 이유가 당신이 나를 챙기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거든요."


한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둘?"

"......아니, 뭐 그렇긴 하지만......"

"난 나름의 계산을 했어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어차피 옷을 아무리 쫙 빼입고 다녀도 레예스가 나한테 온갖 일 시키는 건 달라질 게 없으니까 차라리 제시랑 원래 관계로 돌아간다는 거란 말이죠. 말로 설명하니까 되게 웃긴 거 알아요, 하지만 이게 전부인걸요."


한조는 잠시 굳은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다시 어색한 고요가 흘렀다. 한조는 말없이 레모네이드를 빨아들였고, 이번에는 잭이 침묵을 깼다.


"물론 레예스가 나한테 구박이란 구박은 다 하겠죠. 오리지널 잭의 귀환이니까.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건 그의 조언이에요."


후, 하며 빨대를 입에서 놓은 한조는 찬찬히 입을 열었다. 그는 등을 서서히 뒤로 젖히고 팔짱을 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당신을 도운지는 알아요?"


잭의 얼굴에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띄워졌다. 한조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랄까, 그에 대한 일종의 자극? 도발? 이렇게 말하면 잭 당신이 불쌍해 질지도...... 그건 아니고, 잭 당신이 안쓰럽기도 했고, 아니에요, 그것까진 당신이 알기 힘들겠군요."


잭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이었고, 한조는 말을 이어나갔다.


"레예스가 당신을 꽤 마음에 들어하나 봐요."

"....글쎄요."

"내 눈에 그래 보이는데. 그에게 부탁해 보지 그래요?"


한조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블레이저 재킷을 집어 들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의 잭에게 한 마디 던졌다.


"코디 말이에요, 코디. 한 번 부탁해봐요."








다음 날 아침, 제시의 얼굴은 매우 밝아보였다. 잭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의 옷이 다시 평범한 파란 니트로 돌아가 있던 것이다. 검정 밀리터리 자켓을 입고 있던 제시는 머리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잭을 향해 비웃음어린 눈길을 던졌다. 잭은 그저 방긋 웃어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쓰리피스 수트 차림의 레예스가 수많은 불평불만을 해대며 들어왔다.


“......내가 하늘의 별을 따오래, 아니면 목성에 가서 발자국을 찍어 오라고 했어? 아니잖아. 근데 어째서? 말했잖아, 점심식사로 자허 토르테가 아니라 비너 슈니첼을 원한다고. 나는 원형이 아니면 안 먹는 취향인 거 알면서 굳이 사이즈를 줄였어야 했나? 그리고 냅킨은 왜 장미 모양인거야? 내가 분명히 보트 모양으로 접으라고.....”


그의 시선이 잭에게 머물렀다가 곧 멀어졌다. 잭은 그것이 무엇을 뜻함을 알고 있었다. 실망, 의문, 분노 등등 온갖 감정의 집합체였다. 그는 또다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그는 몰아치는 전화들에 응대해야만 했다. 제시의 비웃음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자존심이 긁힌다는 것은 이런 기분일까? 평생 옷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던 그였기에 한 번 길을 들이니 빼려고 할 때 더욱 힘이 드는 걸까? 어차피 레예스는 상사이고, 제시는 그나마 동급인 비서이니 제시와 친해지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하고 한조와의 관계를 끊는 걸 택했지만 막상 후회감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잭은 메모를 받아 적으면서도, 포스트잇을 붙여 나가면서도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제시의 얼굴이 거슬렸다. 그는 정말 아이 같은 사람이었다. 레예스의 말이 맞았다. 사람은 커갈수록 아이가 된다.



‘한 번 부탁해봐요.’



한조의 말이 계속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잠시 전화기가 잠잠해진 틈을 타 잭은 은근슬쩍 사무실 안쪽, 그러니까 레예스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낮지만 날카로운 어조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무슨 일이지?”

“저, 그게......”


레예스의 검은 두 눈이 잭을 그 자리에 엉거주춤 멈춰서버리게 했다. 레예스가 말했다.


“그 꼴로 이 안에 잘도 들어오는군.”

“사정이 있었어요. 알고 계시잖아요.”


레예스는 잭에게서 눈을 떼고 스케치북을 넘겨보면서 물었다.


“제시와는 이제 잘 해결됐나봐?”

“......아, 아마도요?”

“대신 자네는 폭삭 삭아버리고 말이지.”

“......그럴 지도 모르지만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잭은 잠시 망설였다. 어쩌면 잘릴 지도 모른다. 아니, 잘릴 것이다. 하지만 잭은 이상한 확신, 또는 예감 같은 것이 들었다. 야근 때문에 둘이서만 남곤 했던 밤에 나누었던 대화, 아주 소탈했던 말들은 그에게 그런 감정을 가지게 했던 것이다. 괜찮을 것이고, 욕은 먹는다 해도 도움은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약간의 기대......


대체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제 코디 좀 도와주실래요? 시간이 되신다면요.”


그 다음 레예스의 말이 청천벽력이었다.


“그래, 내 집으로 오게. 오늘 밤 10시. 딱 30분만이야.”





레예스의 집은 뉴욕 중심가에서 약간 떨어진, 공원과 호수에 가까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최고 상류층의 집이었다. 잭은 택시를 타고 가면서도 내내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는데, 그의 집 근처에는 말라빠진 가로수 밖에 없었으며 건물의 벽돌에는 거리의 불량배들이 그려놓은 낙서들이 가득했으나, 레예스의 집이 위치한 거리에는 깔끔하게 가지치기가 된 장미들이나 정원수들이 있었고 턴어라운드에는 거대한 분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하얀 비둘기까지 거리를 우아하게 활보하고 있었다. 낙서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밤이었지만 가로등 덕택이었는지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겼고 잭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었다. 그는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서는 파란 니트를 무심코 매만졌다. 그는 까만 마호가니로 된 문의 황금빛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레예스?”


집 안도 훌륭했다. 고급 양탄자와 도자기들, 알맞게 꽂아져 있는 꽃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손잡이도 마호가니처럼 보였다. 잭은 올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가, 레예스의 평소 성격을 떠올리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는 곧 최근 들어 레예스가 자신한테 보인 호의적인 행동들을 기억해냈다. 어쩌면 자신은 허용될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는 조심조심 계단을 올라갔다. 레예스가 무서운 것은 여전했기에 그의 집 안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막 2층에 도달할 무렵이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레예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잭은 얼어붙은 듯 멈추어 섰다. 그는 분명히 화가 나 있었고, 상대는 전화기 너머의 누군가였다.


[......!]


그 누군가는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당신이 그날 나한테 술만 안 먹였어도......!”

[.........]

“당신이 능력이 있기나 해? 난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왔어, 당신은 날 등쳐 먹으려는 생각밖에 안 하지, 이제 와서 애들을 데려가겠다고? 웃기지마!”

[...!..!..]

“......당신 지금 날 협박 하는 건가?”

[......]

“두 번 다신 내 앞에서 친권이니 뭐니 하는 얘기 꺼내지마! 꺼내는 그날엔......!”


그리고 복도로 걸어나온 레예스의 검은 두 눈과 계단에 우두커니 서 있던 잭의 푸른 두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그들의 시선이 얽혔다. 잭은 숨을 들이켰다.







***시간이 조금 남는 날이네요. 한 편 더 올려봅니다!

하지만 내일부터는......흑.....다시 바빠집니다......ㅠㅠ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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