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은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물론 직장에서의 성공은 확실하게 거두었다. 이제 그의 옷이나 걸음걸이를 보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복잡한 업무들도 서서히 뇌리 속에 박혀가면서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항상 겉은 까맣고 속은 노란색 종이로 되어 있는 수첩이 들려 있었다. 레예스의 지시사항을 받아 적는 속도는 속기에 버금갈 정도로 빨라졌고, 레예스가 그에게 투덜거리거나 불호령을 내리는 횟수도 줄었다. 그러나 잭은 어딘가 불편했다. 그는 완벽주의자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꼭 필요한 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해 버리는 몰염치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제시였던 것이다.


제시는 그 날 그렇게 험한 욕을 내뱉은 이후로 어떤 이유에선지 잭을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잭을 완전히 모른 척 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자면, 잭을 투명인간화 해버렸다는 것이다. 제시는 잭에게 잔소리를 하지도, 심부름을 잔뜩 시키지도 않았다. 다만 오로지 자기 일만 묵묵히 해나갈 뿐이었다. 덕분에 잭의 삶은 조금 여유로워졌지만 그는 점점 불안해졌다. 항상 제시가 자신에게 느닷없이 일을 시키지 않을까 귀를 쫑긋해야 했고, 제시의 앞에서 몸이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의 온갖 욕설들에 대한 반사 작용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어색한 일상이 계속되는 와중이었다. 출근한 잭은 텅 비어있는 제시의 책상을 발견했다. 


"어......?"


제시가 안 오다니? 잭은 속으로 물음표를 띠우고 자기 자리에 가 앉았다. 그렇게 몇 십분쯤 흘렀을까, 유리문이 끼익 하고 열렸고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아,안녕하세요."

".......내가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레예스는 들어오면서 늘 그렇듯이 코트와 가방을 잭에게 내던졌고 잭은 옷장에 거느라 바빴다. 레예스는 바쁘게 통화를 하고 있었다.


"말했잖아, 그렇게 뚱뚱한 녀석이 아니라 베르사체 에로스 화보 같은 모델로 하라고. 브라질리언이라고 다 같은 사람들인 줄 아나? 내 취향을 어디 모르는 거야? 그런 애들 많잖아, 아무나 골라오면 되잖아. .....아, 그 사진작가, 그 사람이 찍은 사진은 말야, 일상의 작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주 거대한 추악함만을 담고 있더군. 커버는 무슨, 책 꼬리에 실릴 조잡한......"


불만과 분노가 가득했던 통화를 끝난 레예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한 마디 했다.


"제시는 오늘 오지 않아. 알고 있겠지?"

"네?"


깜짝 놀란 잭의 반문에 레예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멍청하기는. 병가 냈어."

"하지만......오늘 제임스 홀트의 컬렉션 프리뷰가 있지 않나요? 제시가 없으면....."

"네가 따라와."

"제가요?"


레예스는 한 번 더 눈살을 찌푸리더니 곧 한숨을 내쉬었다.


"너 때문에 내 눈가 주름만 느는 것 같군."






".......올해 컬렉션의 흐름은 대부분 '복고'라고 볼 수 있죠. 자질구레한 아이템부터 시작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파워숄더에 이르기까지....."

"제시가 아니라 당신이 왔네요."


그들은 제임스 홀트의 설명을 들으며 프리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레예스는 지방시(GIVENCHY) 구두의 메탈 디테일을 뽐내며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잭은 한조가 던진 무심한 말투의 문장에 어색하게 웃었다.


"네, 병가를 냈다고 들었어요."

"병가라."


한조의 말투는 오늘 그가 입고 온 프렌치 룩만큼이나 시크하고 또한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잭은 자세를 바로잡고 앞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드레스를 갖춰 입은 모델들이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약 2시간 후, 차를 향해 걸어가는 레예스의 말투에는 서리라도 깔릴 듯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정말이지 끔찍하군, 눈 버렸어. 실망이야......"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한조의 질문에 레예스가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자네는.....저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물론 아니죠."

"컬렉션을 엎어야 해. 이걸 그대로 둬서는 내 일생의 수치가 될 거야."


레예스가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하자 잭이 한조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어째서요? 레예스 마음에 안 든다고 컬렉션 일정 전체를 다 바꿔요?"


한조는 스마트폰 화면을 이리저리 넘겨 보면서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죠. 야근이겠군. 난 회의 때문에 바쁠 테니 야근 도중에 만날 일은 거의 없을 것 같네요."





잭은 이번 야근이 가장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디자이너, 사진 작가, 모델, 일러스트레이터, 카피라이터 등등, 기타 알 수 없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수많은 이들이 레예스의 사무실을 돌고 돌고 또 돌았다. 잭은 그들을 위해 옷들을 받아야 했고 제품을 하나하나 챙겨줘야 했으며 커피와도 같은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처리해야 했다. 그리고 쏟아지는 메일 더미들. 제임스 홀트로부터 날아온 아주 긴 장문의 사과 편지는 그렇다 치고, 컬렉션 일정에 관해 밀려드는 메일과 그에 연관된 전화들은 잭 혼자 힘으로는 너무 부쳤다. 잭은 그제야 제시의 빈자리를 깨달았다. 그의 텅 빈 책상이 그렇게 커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혹시 이것도 그가 노리고 벌인 일은 아닐까? 그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병가를 내고 회사에 출근하지 않을 걸까? 하지만 그건 무리였다. 이 모든 건 제임스 홀트가 컬렉션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것에 있었고, 제시는 그의 컬렉션이 어떤지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잭은 진심으로,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네, 그럼 그때 맞춰서 아자로가 가능한 걸로 알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새벽 3시와 4시의 중간쯤,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사무실은 이제 한산해져 있었다. 늘 그랬듯이 사무실에는 레예스와 잭만이 남아 있었다. 잭은 전화를 끊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그는 너무 지쳐있었다.



"이봐, 뚱뚱보."



잭이 비몽사몽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자 레예스가 맥주 한 병을 그에게 내밀고 있었다. 잭은 맥 빠진 목소리로 감탄했다.


"와우."

"뭐가?"

"아뇨, 그냥......감사해요. 정말로요. 왜 주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잭은 힘겹게 맥주병의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들이키다가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잠이 확 깼다. 레예스가 말했다.


"왜 준 줄 알겠지?"

"아, 네..... 정말 효과적인데요."

"그런 꼴로 다녀서야 여기서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레예스의 말에 잭은 고개를 번뜩 들었다.


"전 괜찮아요!"

"정말인가?"


레예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오른쪽 손목에 찬 에르메스 뱅글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도 해답을 찾지는 못했나봐?"

".....뭘 말씀....."

"제시."


검은 두 눈동자가 일순간 잭을 노려보다가 곧 사라졌다. 잭은 말없이 맥주병을 만지작거리다가 아까 레예스가 그랬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번에 눈치를 보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하지만 전 잘 모르겠어요. 이 단어가 옳은 지는 모르겠는데, 단서가 없는 걸요."


그 말에 레예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다시 잭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잭의 맞은편에 있는, 그러니까 텅 빈 제시의 책상에 가 앉았다. 그가 말했다.


"보통 사람들이 짜증을 낼 때는 말이야, 그 원인이 있는 법이거든."


잭은 멍하니 눈을 뜨고 그를 응시했다. 레예스가 말을 이었다.


"사람은 말이야, 커가면 커갈 수록 그 성질이 정체가 되버려. 아이가 된다고. 무조건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다 안 되는 거야. 그런데 문제가 뭔지 아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거지. 너만 봐도......"


레예스는 턱 끝으로 잭을 가리켰다.


"그런 위치에 있지 않잖아."

".......그 말을 왜 제게 해주시는 거에요?"


잭의 질문에 레예스는 팔짱을 꼈다.


"재밌고 답답해서 그런다."

"뭐가요?"

"네가 하는 꼴이. 네 모양새가. 사회 초년생 티 풀풀 내면서 어떻게든 상사 마음에 들어보겠다고, 인정 받겠다고 그나마 자기 챙겨주는 사람 도움 받아서 옷은 갖춰 입었어. 그런데 이걸 어쩌나, 완전 일이 꼬였는걸."


잭은 머릿속에 작은 혼란이 이는 것을 느꼈다.


"한조가 이 일에 관련이 있나요?"

"알아서 생각해. 어차피 넌 말단부하니까."


레예스는 말을 마치고 몸을 일으키더니 팔을 쭉 피면서 잭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아마도 프랑스어인 듯 했다) 을 중얼거렸다. 그는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 버렸다. 다시 홀로 남은 잭은 눈앞에 떡하니 자리 잡은 제시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넓고, 크고, 쓸쓸해 보이는 책상. 쓸쓸한. 외롭고, 쓸쓸하다. 아무도 그를 챙겨주지 않고, 버려진 듯하다.


잭은 '흡'하고 숨을 급하게 들이키며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바퀴 달린 회전의자가 뒤로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밀려났다. 안에서 레예스의 불평이 들려왔다.


"왜 그렇게 시끄러워?  운석이라도 떨어진 건가?"

"아뇨, 그게 아니라......"


잭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안으로 달려가 레예스와 마주 보았다. 레예스는 향수 화보집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그의 눈에는 어이없음과 놀라움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그가 물었다.


"뭐야?"

"감사해요!"

"뭐?"

"이제야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잭은 어리벙벙한 레예스를 뒤로 하고 나가려다가, 다시 뒤돌아서고 입을 열었다.


"제 생각보다 편집장님은 꽤 좋으신 분 같아요."


그 말에 레예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잭은 말을 이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해주시면 좋을텐데, 평소 이미지는 컨셉이시죠?"

"컨셉은 무슨......"


레예스는 비웃음과 희미한 즐거움이 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잘해봐, 뚱뚱보."










***언제 한번 오버워치 영웅들의 데일리룩을 올려보고 싶네요. 특히 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더욱이^^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기관사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