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 안 돼, 안 돼."


하지만 한조는 그의 뒤를 따라 샘플실로 들어서는 잭을 구태여 막지는 않았다. 잭은 처음에는 모든 벽이 하얀색이라 빛이 반사될 수 밖에 없는 구조에  눈부셔 했다가, 곧 적응이 되자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방이 옷과, 가방과, 구두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하고,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한조가 그를 넓다란 샘플실의 안쪽으로 이끌면서 말했다. 


"당신한테 맞는 옷이 여기 있을 것 같나요? 글쎄, 키가......"

"185cm."

"어깨는 터무니없이 좁고, 따로 운동할 생각은 안 하니 젊은 나이인데도 배만 나왔다 이거죠. 좋아요, 잭."


한조는 그에게 길디 긴 담요 같은 것을 내밀었다. 잭이 눈을 찡그렸다.


"판초?"

"군말 말고."


그들은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잭은 감탄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브랜드를 하나도 모르는 그로서는 그저 '와아' 하는 독립어구 외에는 말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모든 것이 빛나고 있었고, 높이 쌓여있었다. 잭이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 으앗!"

"남자한테 휴고보스 정장은 기본이죠."


한조가 내민 쓰리피스 수트 세트는 꽤 크기가 컸기에 잭은 낑낑거리며 그것을 어깨에 걸쳐야 했다. 한조는  계속 안쪽으로 걸어가면서 혼잣말을 했고, 그럴 때마다 잭에게 무언가를 툭툭 던지듯이 내밀었다.


"신사 구두면 페라가모."

"지방시(GIVENCHY)는 죽이지."

"프라다는 필수."

"사실 사라(ZARA)는 꽤 좋은 디자인이지."

"스와로브스키 컬렉션."


잭은 거기서 끼어들었다.


"그건 여성용......"

"그냥 해봐요."


그들이 다시 샘플실 문앞에 도달했을 때쯤에 잭의 몸에는 온갖 구두와 옷과 시계가 매달려 있었다. 잭은 등과 어깨, 심지어 목에도 걸쳐 맨 온갖 명품의 무게에 짓눌릴 것만 같았지만 그는 꾹 참고 자신을 훑어 보는 한조를 응시했다. 한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뗐다.


"일단 뷰티팀에서 헤어부터 어떻게 좀 해보죠."







그런 일이 있은지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이제 잭은 한조의 도움으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그의 하얀 피부 톤에 맞춘 베이지 컬러 오버 롱 코트,  다음 날은 자칫 밋밋할 수 있는 네이비 트렌치 코트에 구찌벨트로 포인트를, 또 다음 날은 가볍게 검은 카디건과 안에는 산뜻한 타탄체크의 면티, 더해서 토트 와치와 방말 벨트로 약간의 섹시함을 더했다.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신호등 앞에서, 가게 앞에서, 아니면 택시를 탈 때 자신한테 쏟아지는 시선을. 그 변화는 직장에서도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지난 번에 발렌티노 드레스....."


레예스는 잭의 책상에 코트와 휴고보스 브리프 케이스를 내던지고서 그의 탁자에 잡지를 늘어놓고 있던 잭을 발견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칫하고 잭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잭은 옅은 미소를 띠웠다.


"윈저 그린없나? 버밀리온은 너무......"


잭은 레예스의 전화를 뒤로 하고 슬쩍 빠져나왔다. 그는 남몰래 씨익 웃었다. 성공했어! 성공! 잘했다, 잭 모리슨! 장하다, 잭 모리슨! 네가 못할 게 뭐가 있겠니! 잭은 자화자찬과, 더불어 한조의 도움에 대해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언제 한 번 한조에게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살찌지 않는 건강식으로. 잭은 오랜간만에 맛보는 자유로움과 성취감을 느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돌체 앤 가바나에서 들어온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메일창을 열었을 때였다.


"Son of bitch."

".......네?"


어느 샌가 책상 앞에 바싹 다가온 제시가 자신한테 던진 말이었다. 잭은 영문을 몰라 반문했다. 그가 버벅거렸다.


"가, 갑자기 왜....."

"쓰레기 새끼. 병신 같은 놈. 머저리. 차라리 암스테르담 창녀촌에서 성매매나 하지 그래?"

"무, 무슨."


그러나 제시는 갈색빛이 서리게 경멸 어린 눈빛을 그에게 던졌을 뿐이었다. 잭은 당황한 채로 조용히 자기 책상에 가 앉는 제시를 바라보았다. 타자를 치는 그의 손가락에 유난히 힘이 들어간 듯 했다. 잭은 그저 그의 파란 두 눈을 깜빡거렸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물론 제시는 자신을 좋아한다거나 아껴주는 선배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까의 상황은......

그는 대처법을 알 수 없었다. 


"저, 제시?"


그는 제시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러나 정작 대화의 대상은 모니터에서 단 한 가닥의 눈길도 그에게 주지 않았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

"잘못했다면 사과할게요. 이러지 마요. 제시?"

"......"

"제시?"

"Don't make a fuss!(지랄하지 마!)"


갑자기 제시가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는 바람에 잭은 뒤로 물러섰다. 그 바람에 제시가 입고 있던 레더 브레스티드 재킷과 프라다 셔츠가 약간 구겨졌지만, 그는 아주 약간의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그가 이를 갈면서 말했다.


"지금이 업무 시간인 걸 다행으로 여겨."

"......."


잭은 그의 시린 갈색 눈에 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만 아니었으면......널 조졌을 거야."

"거기 뭐하는 거지?"


그때 낮지만 분명한 레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거의 반사적으로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레예스가 말했다.


"옴니아 아메시스트 화보를 찍은 작가가 누군가?"


잭의 귀에는 이상하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는 마음이 복잡했을 뿐이었다.







제시는 일이 끝나자마자 번개 같이 나가버렸고, 한산해진 집무실에는 레예스와 잭만이 남았다. 잭은 아무 생각없이 왼쪽 손목에 찬 오메가 와치를 만지면서 계속 낮의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제시는 늘 자신을 못살게 구는 편이기는 했다. 자신이 레예스에게 당하던 시절에도 단 한 번도 도움을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가 오늘 들었던 그 수많은 욕설들과, 그의 한기 어린 눈빛은, 이제야 사회 생활을 시작한 초년생인 그한테는 과분할 따름이었다. 그때 안에서 레예스가 말했다.


"드 마쉘리에."

".......연결됐어요!"


레예스는 두런두런 전화를 이어나갔고, 자신은 홀로 오렌지색 책상에 앉아 스탠드 하나에 의지한 채 쓸쓸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제시는 왜 그랬을까? 내가 뭘 잘못했나? 저번에 몽블랑 만년필은 잘 돌려줬는데. 잭은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없었다. 오로지 알 수 없는 정황들만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 또 흘렀을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낮의 일 때문이겠지?"

".......예?"


잭은 방금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그러나 분명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레예스 밖에 없었다. 그는 마른 세수를 하고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뭐.....뭐가요?"

"고민하고 있잖아, 일에도 집중 못하고."

"......"

"감정이 다 드러나는 얼굴이라서."


그때 안쪽에서 레예스가 탄산수 병을 들고 걸어나왔다. 잭도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레예스가 손을 내저어 만류하자 다시 앉았다. 레예스는 탄산수를 한 번에 반을 들이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직장 생활을 하겠나?"

"......."

"눈치가 너무 없어."

"......."


레예스는 남은 탄산수를 쭉 마셔버리고 병을 잭에게 던졌다. 잭은 얼떨결에 빈 병을 받고서 앞에서 왔다갔다하는 레예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쓰리피스 수트에서 와인색 셔츠와 페라가모 벨트, 스트라이프 패턴의 팬츠만이 남아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 직장 환경에 녹아든다고 되는 게 아냐, 직장 생활이란 건. 네가 아무리 옷을 잘 입으려 애를 쓴다고 해도, 결국 그 환경을 만든 이들은 우리 같은 인간인데,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야 가능하겠나?"


잭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기에 감히 끼어들 수도 없었다. 레예스는 피곤한지 고개를 까딱하고 말했다.


"내가 왜 이걸 말해주는지 아나?"

"......"

"네가 내 생각보다는 영리한 것 같고, 가능성도 있어보이니까. 여기서 죽진 말라는 거다. 그럼 이만. 퇴근."


레예스는 멍한 잭을 내버려두고 코트와 가방을 들고 나오더니 홀로 나가버렸다. 밤의 찬 바람이 안으로 밀려왔다. 잭은 혼자 남은 사무실의 공기가 싸늘해졌을 때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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