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패션잡지사에 입사를 했다고?"


잭은 방금 막 전자레인지에 데운 라자냐를 씹은 터였기 때문에 간신히 삼키고 나서야 대답을 할 수가 있었다.


"네, 어쩌다 보니깐요."

"옷 하나 입을 줄 모르는 녀석이!"


스웨덴에 사는 그의 늙은 친척 토르비욘은 그가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대학 입학 후 잭의 부모님은 여행 중 사고로 그만 세상을 떠났고, 그나마 잭을 챙겨주는 혈육은 스웨덴이라는 멀디 먼 타지에 있는 토르비욘밖에 없었다. 잭이 말했다.


"괜찮아요."

"기자가 되겠다고 했었잖아."
"....돈이 필요하니까요. 일단 어쩔 수 없죠."


토르비욘은 이러쿵 저러쿵 잔소리 같은 회사 생활 팁들을 알려주었다. 상사에 대한 눈치, 미래에 생길지도 모르는 후배에 대한 밀고 당기기, 각종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 잭은 그 외에도 쏟아지는 토르비욘의 말들을 귀담아 듣기는 하였으나 곧 흘려버렸다. 과연 그것들이 자신이 다니게 될 잡지사에 통할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특히나 레예스는 더욱 그랬다.


전화는 꽤 길었고, 잭은 예의상이나 관계상이나 전화를 끊을 수는 없었으므로 잠자코 있었다. 토르비욘은 이상하게 안타가움이 느껴지는 웃음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잭도 미소를 띠우면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벌써 밤이 깊어있었다. 내일의 첫 출근을 위해서라도, 그는 일찍 자야만했다. 그 비싸디 비싼 브랜드만 걸치고 향수 냄새 풀풀 풍기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들어 가기 위해서는 말이다. 잭은 세수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하려 했다. 바로 그때,


"에?"


벨소리가 울렸다. 오늘 받아둔 직장 선배 제시의 번호였다. 이 시간에 어째서.....? 그는 시계를 힐끗 하고선 지금 시각이 밤 10시를 향해 감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아들었다.


"잭 모리....."

"지금 당장 스타벅스에서 거품 잔뜩 인 카푸치노 네 잔 갖고 와. 손 델만큼 뜨겁게. 그리고 에르메스 매장 가서 에스닉 뱅글 찾고 와."


What......? 잭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뚜뚜뚜 하는 소리에 당황했다. 카푸치노 네 잔? 에르메스? 뭐라고 방금? 출근은 내일부터 아닌가? 애초에 이 시간에 부른다는 게 정상은 아니다. 잭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다 가기도 전에, 그리고 잭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제시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하는 거야?! 당장 가져와!"


전화는 다시 끊겼다. 잭은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죄송해요, 에르메스 매장 위치를 몰라서......"

"그것도 모르면서 비서 일을 한다고 했어? 웃기고 있네, 빨리 자리로 들어가, 오늘 비상이야!"


잭은 아슬아슬하게 카푸치노 네 잔과 에르메스의 에스닉 뱅글이 든 종이 상자를 제시에게 넘겨주고선 자신의 책상으로 보이는 빈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에르메스의 존재도 몰랐고, 매장은 어디 있는 것이며 문 닫기 10분 전에 간신히 찾아 들어 갔지만 에스닉 뱅글을 몰랐던 그는 그것을 직원에게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던 것이다. 어딘가에서 레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카푸치노는?"

"여기 있습니다!"


제시는 날쌔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나마 숨을 돌린 잭은 조심히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편집장님께서 이번 호 컨셉이 도저히 마음에 안 드신다고 전 직원 비상을 걸었어. 우리 모두 잘못하면 교수형이라고."


잭은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과연 레예스와 여성 디자이너 두명, 낮에 본 긴 머리의 동양 남자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마치 전쟁 직전 전세를 역전시킬 전술이라도 짜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때 제시가 그를 그쪽으로 밀쳤다. 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왜, 왜요?"

"보고 배워."

"봐도 되나요?"

"넌 너무 몰라서 좀 볼 필요가 있어. 가봐!"


잭은 제시의 말대로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회의 장소를 향해 갔다. 그들의 목소리는 매우 조용했다. 잭은 늘 가지고 다니던 수첩과 펜을 꺼내고 그들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레예스의 투박한 손끝은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유려하고 부드러운 옷들을 수없이 매만지고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전혀 획기적이지 않아, 단조로워......"

"이번에 고전적인 로맨스 영화들이 많이 나왔더라고요, 그러니까 파리지엥 느낌으로 도트 와치라면......"

"그건 3월 호에 이미 썼잖아. 그리고 겨울에 도트 와치는 너무 뻔하고 진부해."

"이런 인버네스코트는....."

"그런 옷이 있었어? 잠깐....... 가을 벽난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지."

"칙칙해 보이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했는데, 여기 클래식 벨트가 아니라 방말 벨트를 배치한다면,,,,,, 무채색이 아니라, 유채색으로, 어울리는 새깔 없나?"

"잠깐만요, 여기요. 근데 너무 달라서 결정을 못하겠어요."


잭은 한 여성 디자이너가 손에 든 두 개의 벨트를 보고 풋 하고 웃었다. 그의 눈에는 너무나 비슷해 보이는, 다만 버클 부분이 조금 다른 벨트들이었던 것이다. 잭은 그 순간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레예스가 집은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미묘한 화가 나 있었다.


"......왜, 왜 웃어?"

" 아니, 그게......"

"이게 웃겨, 지금?"

".......그러니까, 제 눈에는 그냥, 다 똑같은 잡동사니로 보여....."

"잡, 동, 사, 니?"


레예스는 그가 내뱉은 단어를 되풀이했다. 잭은 긴 머리의 동양인이 뒤에서 한숨을 내쉬고 그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동양인의 표정은 잭에 대한 약간의 분노와 함께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 이제 망했군요. 레예스가 말을 이었다.


"그거 아나? 지금 네가 늦은 밤 시간에 상사의 부름에 의해 온갖 짜증을 내면서 급하게 입고 온 그 셔츠의 색깔. 연해서 살구색 같아 보이지?. 하지만 그건 살구색이 아니야. 그건 라이트 핑크야. 20세기 후반부터 염료 혼합 기술이 발전해서 

그만큼 색들도 다양해졌지. 아이폰 6s 플러스 케이스 중에 라이트 핑크가 있어. 여성들의 취향을 사로잡은 탁월한 선택이었지. 크리니크 처비스틱과 팝 매트 컬러 중에도 라이트 핑크가 있지. 사라 (ZARA)의 벨벳 스니커즈 중에서는 라이트 핑크 리본 벨벳 스니커즈가 있어. SPA 브랜드치고는 보기 드문 감각이지. 로즈몽의 시계와 목걸이에는 반드시 라이트 핑크가 쓰이고, 저번에 나온 까르띠에 옴므 와치에도 라이트 핑크가 쓰였지. 조르지오 아르마니, 랑콤, 바비 브라운, 에스티 로더, 샤넬, 다른 모든 화장품들의 라이트 핑크 열풍, 그런 유행과 값비싼 명품의 강을 돌고 돌아 비로소 너 같이 패션을 잡동사니 취급하는 인간들이 가는 할인매장에 진열되는 옷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거기까지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의 노력, 그리고 그 '하찮은' 색깔 하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리는지 자넨 생각이나 해봤나?"


잭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서 있다가 어딘가 막힌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전 단지......그 벨트 두 개의 차이를 모르겠다는 것 뿐이었어요."


그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레예스는 눈을 깜박거리고서 툭 내뱉었다.


"자넨 눈도 없나?"


잭은 그곳엔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멈칫거리다가 몸을 휙 돌려 빠져나와버렸다. 언뜻 자신을 향해 고소한 비웃음을 던지는 제시의 얼굴이 보였다. 일부러 그런 거였구나. 하긴, 그가 자신을 도와줄리는 없었다. 무언가를 배우라고 할리는 없었다. 잭은 편집장실을 나가 바로 밖에 있는 계단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곳에 가니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비록 답답한 건물 산소였지만, 그는 그나마도 반갑게 들이내쉬었다. 저 안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으므로.


"괜찮아요. 원래 저런 사람이거든."


그때 푹 숙인 잭의 시야에 길고 검은 머리가 들어왔다. 잭이 고개를 들자, 아까 인버네스코트를 레예스에게 추천하던 동양인이 보였다. 그는 잭과는 약간 거리를 둔 채로 그에게 체크무늬의 실크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잭은 울먹거리며 말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손수건은 필요없어요."

"굳이 손수건을 빼앗지 않으려는 그쪽의 마음 역시 정말 고맙지만 지금 그쪽이 울고 있어서요."


잭은 결국 손수건을 받아들고서 코를 팽 풀었다.(동양인은 약간 얼굴을 찌푸렸지만, 별 말을 하지는 않았다.) 잭은 반으로 접어 눈물을 마저 닦아낸 후에 돌려주려고 했으나, 동양인은 말을 덧붙이며 점잖게 거절했다.


"사실 버버리 소품은 스타일이 획일화 되버렸죠. 하나 없는다고 해서 티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잭이 울음을 멈추자. 그가 자기소개를 했다.


"시마다 한조에요. 편하게 한조라고 부르세요."

"여, 여기 있어도 괜찮으신가요?"

"음, 부츠 찾아온다고 내뺐거든요. 모리슨 씨가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아서."


잭은 고개를 숙였다. 한조가 말했다.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세요. 이런 일은 흔한 법이니까. 다만 당신이 패션에 유난히 젬병이긴 한데, 그게 이 직장에서 살아남는데 가장 큰 방해요소가 되리란 점은 부정할 수가 없네요. 어쨌든, 레예스 앞에서는 그냥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아까 말을 주고받았잖아요!"

"그야 나는 신임을 쌓았으니까."


한조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아니죠. 무엇보다 그의 눈에 거슬리는 하나의 곰팡이 같은 존재일걸요. 일단 외형부터......"


그는 말을 흐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나저나 대체 회의는 왜 듣고 있던 겁니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을 텐데."

"제시가 보냈어요."

".......제시가요?'

"네."

"이런, 화 좀 내야겠는걸."

"왜요? 당신이 그의 직속 상관인가요?"


한조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날 일부러 보냈어요. 욕 먹게 하려고......"


한조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는 손목시계를 내려다 보고서 말했다.


"가봐야겠어요. 당신은 오늘 그냥 가는 게 어때요?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리고 그는 유리문 너머로 바람처럼 미끄러져 들어가 버렸다. 그의 검은 머리칼이 연기처럼 공중에 휘날리는 게 참으로 신기하다고 잭은 생각했다. 그리고 아까보다 약간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을 느끼며, 갈색의 체크무늬 손수건은 주머니에 넣으려다가 그냥 가만히 손에 쥐었다. 콧물이 묻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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